김원봉
김원봉 서훈 원하지만.. 유족은 왜 문 대통령 걱정했나
김학봉 여사는 경남 밀양 출신 항일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 장군의 막내 동생이다. 약산과는 34살 터울로 11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48년 약산이 자발적으로 북한으로 떠난 뒤, 단 하루도 편한 날을 보낸 적이 없다. 한국전쟁 중 오빠 4명과 사촌 5명이 보도연맹사건으로 총살 당했다. 아버지도 고문을 당한 뒤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남은 오빠는 처형된 형제와 사촌들의 시신을 수습했다는 이유로 5.16 쿠데타 이후 군사혁명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김학봉 여사도 종로경찰서에 끌려가 크게 모욕 당했다. 김 여사는 결국 김태영씨를 포함해 자녀들을 고아원으로 보내 생활하게 했다. 1980년 연좌제가 폐지된 뒤에야 아들 김태영씨는 미국으로 떠났다. 남은 김학봉 여사는 오빠 김원봉의 명예회복을 위해 애썼다. 하지만 그 어떤 정권에서도 약산 김원봉의 서훈을 허락하지 않았다. 김학봉 여사는 지난 2월 24일 새벽 9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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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김원봉과 노덕술의 조우에 대한 일화는 익히 알고 있는 얘기다. 상상만으로 김원봉이 얼마나 열이 받고 분통했을지 미루어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런데 기사를 읽어보면 그의 가족과 일가친척들 역시 고초를 겪은 모양이다. 위 기사로 미루어 보면 대한민국에서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이 어떤 고생과 고초를 격었는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해방이 되고 한국전쟁 중 일가족 및 친척들이 죽고.. 그 친척 5명도 보도연맹으로 몰살을 당했고.. 아버지는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 남은 오빠는 처형된 친척들의 시신을 수습했다는 이유로 무기징역 선고... 70년간 그 어떤 정권도 김원봉을 인정하지 않았다.
도무지 이해,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이 벌어지고 있는 대한민국이다. 문제는.. 저와 같은 황당함과 어처구니없음이 2019년 오늘 현재도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막말로.. 소위 일부 보수 노인들이라는 사람들은 이제 늙기도 했거니와 또 옛날 배움의 기회가 적어 무지했을 수 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측면이 있다고 치지만.. 2019년 오늘날.. 배울 만큼 배웠다는 소위 똑똑하다는 젊은 법조인, 변호사, 국회의원, 정치인 등의 사람들 중에도 독립운동가를 여전히 빨갱들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강용석 친일 청산 논쟁
여전히 일부 독립운동가를 빨갱이라고 여기거나 인정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 중에 방점을 찍어야 할 단어는.. 법조인, 정치인이 아니라.. 바로 젊은 사람 이라는 단어다. 젊은 사람들은 전근대적 시대를 살지도 않았고, 배움의 기회가 적어 어리석거나 우매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그들은 친일적 보수주의적 인식과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젊은 사람들이다. (추측이지만 아마도 돈과 출세와 관련이 있지 싶다.)
대체 젊은 사람, 청춘, 청인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은 없고 젊은 나이에 편법과 약삭빠름으로 출세와 입신양명만이 삶의 목적인 듯 보이는 그런 청춘의 젊은 사람을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문명과 청춘
이제는 다수를 위해 자기를 희생했던 독립운동가와 그 희생의 여파를 100년의 시간 동안 후손이 격은 고초들에 대한 어떤 조치가 필요하지 싶다. 그리고 친일파들이 100년간 누려온 것들은 지금 당장 어쩌기는 힘들더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친일파들의 행적을 역사에 남기고 친일의 청산하는 과거를 들쑤시는 것이 아니라.. '옳은 것', '정당한 것', '정의로운 것', '합리적인 것', '옳은 것'의 구현임을 인정하고 실천해야 할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는 앞으로 누가 자신을 희생해 가면서 타인이나 국가, 공익을 위해 싸우고 자신을 희생하게겠는가? 김원봉의 사례를 보면서 생기는 어치구니없음과 황당함과 답답함을 이제는 끝내야 하지 않을까? 대체 얼마나 많은 후손들과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동안 김원봉 사례와 같은 일화를 보고 들으면서 황당함을 경험해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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