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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13, 2024

슬픔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고, 영원히 끝나지 않으리…

 



“과연 개인이 그의 반항적 운동 과정에서 기꺼이 죽음을 무릅쓰고 또 실제로 죽게 된다면, 그는 그걸 통해서 하나의 선, 즉 자기 개인의 운명을 초월하는 어떤 선을 위하여 스스로를 희생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셈이다. 우리 자신은 반항도 못 한 채 당해 왔던 박해가 타인에게 가해지는 것을 보면 오히려 견딜 수가 없어지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 알베르 카뮈, ‘반항하는 인간’ 中 -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 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 러셀 -

***

종이 한 장을 내밀며 이름을 대라고 겁박을 당했을 한 사람의 고독이, 외로움이, 두려움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80년대 얘기가 아니다. 조국 사노맹이란 단어를 보아하니, 2019년쯤 아기인 듯하다. 여전히 어디선가에서 ‘종이를 들이미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다.

종이를 내밀었던 인간이 공안 형사였을지, 공안경찰이었을지, 아니면 공안검사였을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공안 형사, 공안경찰, 공안 검사, 공안 판사들은 끝없이 새롭게 태어나고, 오늘도 내일도 선한 얼굴을 하고 우리들 틈에 혼재되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을…

2024년 현재에도… 없는 죄를 만들어 뒤집어 씌우고, 끌려가 종이와 마주했던 사람들을 운동권이라고 조롱을 하는 시대를 사는 우리는 여전히 매우 슬픈 시대를 살고 있음이 분명하다.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별로 없다. 굿이 차이라고 한다면... 80년대는 독재자가 폭력을 이용하여 권력을 잡았지만, 2024년은 국민들의 자발적 선택에 의해 권력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누구를 탓할 것인가?

타인이 겪는 고통에 대한 연민을 가지려 했던 러셀, 그리고 반항도 못한 채 속절없이 박해를 당했던 인간은 타인에게 가해지는 박해를 보고 견디지 못한다고 믿었던 카뮈… 카뮈도, 러셀도 인간에게서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카뮈와 러셀은 대부분의 인간은 타인이 겪는 고통에 대한 연민을 갖지 않으며, 과거에 박해를 당했던 사람이라도 지금 타인에게 가해지는 박해를 보고 외면할 수 있다는 현실을, 인간의 본성(?)을 잘 몰랐던 모양이다.

오직 ‘극소수’의 사람만이 타인이 겪는 고통에 대한 연민을 가지며, 과거에 속절없이 박해를 당했던 사람들 중에도 매우 ‘극소수’의 사람만이 타인에게 가해지는 박해를 보고 그냥 넘기지 못한다.

오늘을 사는 다수의 우리는 그저 외면하고 회피하며 일신의 안녕과 안위 또는 호가호위를 위해 모르는 듯, 못 들은 듯, 못 본 듯 살아간다. 차라리 알면서도 '~모르는 척', '아닌 척'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나마 이해할 수 있다지만… 아예 모르고,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은 보아줄 수가 없지만, 그들을 어찌할 방법은 없다. 갑갑한 마음을 간직한 채 하루하루를 연명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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