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ober 18, 2014

달콤한 나의 도시
my sweet city


"어쩌면 우리들은 사랑에 대해 저마다
한 가지씩의 개인적 불문율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문제는 자신의 규칙을 타인에게 적용하려들 때 발생한다.
자신의 편협한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진 기준을,
타인에게 들이대고 단죄하는 일이 가능할까.
사랑에 대한 나의 은밀한 윤리감각이 타인의 윤리감각과 충돌할 때,
그것을 굳이 이해시키고 이해받을 필요가 있을까"

-달콤한 나의 도시, 정이현





***

이해 시키고 이해 받으려고 한 것이 아닌데 왜 충돌이 발생하지?

충돌이 발생하는 경우는 두가지 경우다.
하나는 내가 나의 윤리감각을 드러냈을때 오리랖넓은 타인이 반응할때와
다른 하나는 타인이 드러낸 윤리감각에 내가 오지랖넓게 반응할때 뿐이다.

이해시키거나 이해 받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라면
굳이 그 윤리감각을 드러낼 필요는 없으며 따라서 충돌은 발생하지 않는다.
말하거나 드러내지 않는데 어떻게 충돌이 발생하겠는가.

물론 이해와 동조나 인정은 다른 것일 수도 있겠다.
그것이 개인적 규칙이든, 나름의 불문이든 혹은 윤리감각이든
그것을 드러낸다는 것은 이해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누군가의 동조를 바라는 희망에서가 아닐까 싶은데..

그리고.. 단죄까지는 아니라도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편협한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진 기준을 어떤 식으로든 강요하는 존재인데.. 그럼 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무인도같은데서 혼자 유일하게 존재해야하나..?

충돌하지 않고, 이해 시키거나 이해 받으려 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고, 아무것에도 반응하지 않는 것인데
그런 초인적 해탈의 경지에 이른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강요와 충돌은 인간사이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문제는 강요나 충돌이 발생하는 그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강요와 충돌을
어떻게 서로 양보하고 타협하느냐는 작동방식의 문제이지 싶은데..아닌가..쩝.
물론 그 양보에 의한 최선의 결론이나 선택은 각자 개인의 몫이겠지만 말이다.

인간이 끝없이 추구하는 것중의 하나는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는 동지를 구하는 것이다.
즉 내가 가진 그 어떤것에 대해 최소한의 동조 혹은 인정을 얻고자하는 것이다.
그럴려면 내가 어떤 존재인지 드러내야 하고 그 과정속에 강요와 충돌은 필할 수 없다.

언제나 선택은 자신이 하는 것임으로 최종 결정권은 자신에게 있는 것임으로
강요와 충돌을 필요이상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피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들과 때론 맞서고, 때론 공존하려고 하는 용기와 이해일 것 같다.

이해 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해 하려는 것 말이다.
아, 그리고 필요이상의 과도한 오지랖스러움도 자중해야 할 것임에 틀림없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