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 이준관
어렸을 때는
내 머리에 떨어지는 비가 좋았다
비를 맞으면
해바라기 꽃처럼 쭉쭉 자랄 것 같았다
사랑을 할 때는
우산에 떨어지는 비가 좋았다
둘이 우산을 받고 가면
우산 위에서 귓속말로 소곤소곤거리는
빗소리의 길이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았다
처음으로 집을 가졌을 때는
지붕 위에 떨어지는 비가 좋았다
이제 더 젖지 않아도 될 나의 생
전망 좋은 방처럼
지붕 아래 방이 나를 꼭 껴안아 주었다
그리고 지금
딸과 함께 꽃씨를 심은
꽃밭에 내리는 비가 좋다
잠이 든 딸이
꽃씨처럼 자꾸만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것을
보는 일이 행복하다
***
삶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닌가 보다.
비가 오면 비오는대로, 우산은 우산대로,
옥탑방은 옥탑방대로, 텃밭은 텃받래로
나름의 행복을 주는 것 같다.
다만 우리 스스로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이 내 탓인가 아니면 비의 탓인가?
비는 오래전부터 비 였으니 비 탓 같지는 않다.
우산도, 집도, 텃밭도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나 이전의 아주 예전부터 그들이였음으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분명 내 탓임에 틀림이 없다.
나도 작은 것에 행복할 줄 아는 사람이고 싶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과 조우하고 싶다.
큰 것에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
큰 것이 없으니 큰 것을 줄 수가 없다.
한데 다들 큰 행복을 원하는 것 같다.
아무래도 난 그런 그들과는 어울리는 것 같지는 않다.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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