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mber 25, 2017

당신이 편안하다면, 저도 잘 있습니다


Si vales bene est, ego valeo.
당신이 편안하다면, 저도 잘 있습니다.

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합니다. Si vales bene est, ego valeo. '당신이 편안하다면, 저도 잘 있습니다' 라틴어를 강의하는 한동일 신부에 따르면 로마사람들은 편지를 쓸 때 늘 이 문구를 앞머리에 붙였다고 합니다.

이와 반대되는 말은 아마도 '각자도생'이 아닐까. 생각해보면 우리는 각자도생에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친구지간에도… 경쟁은 생활이었고 나만, 혹은 우리 가족만 잘 살면 된다는 각자도생의 철학은 우리를 늘 유혹했지요.

우리는 말로는 성직이라면서 구멍가게 주고받듯 세습하는 대형 교회와 중소기업을 쥐어짜서 몸을 불리는 재벌들과 성추행을 하고도 큰 탈 없이 잘 살아남는 직장 상사들과 심지어는 국민의 막대한 세금을 쌈짓돈처럼 나눠먹던 위정자들 사이에서도, 그 모든 것의 피해자는 바로 우리라는 사실을 잊고 싶은 듯 타인의 고통에는 무감해져 왔던 것이 아닌가….
아니었습니다. "괜찮으신가요?" 지진이 일어났던 지난 수요일 SNS를 뒤덮었던 안부의 말들. 예기치 못했던 재난 앞에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가까이 있었던 시민들은 포항으로 달려갔고, 수능의 시계는 포항의 학생들을 위해 일주일 늦춰졌으며, 동료 수험생들을 향한 경쟁자들의 응원의 글마저 넘친다 하니... 세상은 우리를 각자도생의 길로 내몰았지만… 그 길에서도 우리는 우리의 품격을 잃지 않고 있었던 것이겠지요.

1995년 1월 17일을 기억합니다. 일본 고베에서는 대지진이 일어나 64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현장을 취재했던 외국 기자들이 가장 신기했던 것은 그 참사의 와중에도 시민들이 무척 침착했더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통곡하지도, 허둥대지도 않았고, 기존의 언론이 전해주지 못하는 내용은 자신들만의 동네 라디오를 통해 정보를 전하는 기민함까지 보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들도, 얼핏 보면 각자도생의 길 위에 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네 평범한 사람들은 고베의 시민들 못지않은 타인에 대한 배려를 간직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다시 떠올려 보는 Si vales bene est, ego valeo. '당신이 편안하다면, 저도 잘 있습니다.' 오늘(20일)의 앵커 브리핑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사족입니다. 서울 강남의 학원가에서는 수능 일주일 연기를 맞아서 발 빠른 특가 상품을 내놓았다던데… 저는 차라리 지난주 대피소에 있던 포항의 한 여학생이 해준 약속에 우리의 미래를 걸겠습니다.

***

위 앵커브리핑을 읽으면서 잠시 먹먹했다. 영상보다는 글로 읽으니 더 거시기하네...쩝.
암튼.. 작금의 시대에 사람이 품격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다. 사람이 품격을 가지려면 일단 먹고사는 문제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야 한다. 당장 오늘을 걱정해야 하고, 내일을 걱정해야 하는 팍팍하고 가난한 일상에서 어떤 개인이 품격을 갖기는 대단히 어렵다. 최저임금이니 최저 생계비 하는 말들이 그래서 필요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품격을 가지고 유지하려면 최소한의 자본, 즉 돈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가난한 삶 속에서 품격은 존재하기 어렵다. 가난은 자유와 선택을 제안하기 때문이다. 가난하면 자유가 제한되고 선택권도 그만큼 줄어든다.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나누고 싶은 것에 제약을 받는다. 그런 까닭에 가난하면 더 보수적이 되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두려움과 겁도 많아지게 되며 그래서 다시 더 보수적이 되는 악순환을 격게 될 가능성이 높다. 지금 갖고 있는 것이라도 지키려는 심리로 인해 품격은 고사하고 더 악착같아 지는 경향도 있다.

더 큰 문제는 인간의 품격을 방해하는 그 가난이란 것에서 유발되는 두려움과 절박함으로 인하여 개인이 심리적 노예 상태가 계속 유지되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 놓이지 않고, 그러한 심리적 상태에 빠지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열심히 부동산과 보험 같은 금융상품 등의 재테크에 죽어라고 목을 매는 것이다. 눈만 뜨면 사방에서 재테크하라고, 재테크 안 하냐는 말을 귀에 딱지가 박히도록 듣는다. 그러지 않거나 그러지 못하면 주변의 시선으로부터 바보가 된다. 물론 누가 바보인지는 알 수가 없다.

매일매일 쏟아지는 사건 사고 소식들.. 다른 나라에서 10년 동안 벌어질 일들이 한국에서는 한 달 사이에 벌어지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대한민국은 너무 역동적(?)이다. 너무나 역동적이라서 따라가기에도 버거운 변화 속에서 바보가 안되려면.. 시대를 놓치지 않고 쫓아가려면.. 정신도 없고 체력도 딸린다. 그런 속에서 던져지는 질문: 나 잘 살고 있는 건가? 저는 잘 지내고 있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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