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ember 26, 2020

왜 배우는가..?

 


왜 배우는가?

https://blog.naver.com/parangbee/221478713273

https://youtu.be/dmVg3zRLa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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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봤던 영상이며 오랫동안 생각했던 주제이다. 그래서 여러 번 시청했으며 지금도 가끔 기회가 되면 다시 보고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영상이며 주제다. 이 강연을 보고.. 우리가 흔히 공부 잘한다거나 머리 좋다거나 하는 직업군 - 예를 들면: 판사 의사 변리사 회계사 및 그 외 기타 분야의 사람들 - 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과연 그들은 현명한 사람들인가? 암기력이 좋다는 것이 선민의식이나 특혜 혹은 특권을 부여할 만큼 그렇게 위대한 것인가? 생각해 볼 주제다.


대체 우리는 왜 배우는 것인가, 도대체 배움이란 무엇인가? 그러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았던가? 돈을 잘 벌기 위해서 공부하고, 배우는 것인가? 판사, 의사, 변리사, 회계사 및 그 외 기타 소위 전문분야의 사람들뿐 아니라.. 우리는 왜 공부하고 배우는 것일까? 그러한 질문들에 실마리를 제공해 주는 강연이라고 생각된다. 기회가 된다면 시청하기를 추천한다.



영상을 볼 때마다 정리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미루다가.. 이제야 내용 정리를 했다. 


인간의 성장과정이란 곧 배우는 과정이다.

배운다는 것은 자신에게 갖추어지지 않은 것을 갖추는 것이다.

또한 배운다는 것은 지식을 축적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왜 배우는가, 왜 지식을 축적하는가?

생존 확률을 높이고 자유롭기 위해서다.

배워서 지식이 있다는 것은 '나'가 자유롭다는 의미다.


배운 사람은 생존의 질과 양이 좋다.

배우지 못한 사람은 상대적으로 생존의 질과 양이 저하된다.

따라서 배우지 못한 사람은 배운 사람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다.

배우지 못한 사람은 생존의 주도권이 없어.. 배운 사람에게 종속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배운다는 것'은

지식의 습득, 즉 글 공부, 이론적 지식의 습득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흔히 알고 있는 위아 같은 방식의 '지식의 습득'은 '배우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보자.. 5차 방정식을 풀 줄 아는 사람과 4칙 연삭만 할 줄 아는 사람 사이에는

자신의 경험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의 엄청난 차이가 있다.

즉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지식을 쌓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통제할 수 있는 자유와 범위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즉 그 둘 사이에는 생존의 질과 양이 달라지는 것이다.


지식의 또 다른 능력은 '세계'를 확장하는 능력이다. 그것의 한 예가 '은유'다.

은유란 무엇인가?

은류란 전혀 다른 서로 이질적인 것이 그 사이에서 동질성을 갖고 서로 연결되는 것이 은유다.


창의란 이처럼 (은유를 이용하여) 서로 다른 것이 서로 연결됨으로써 새로운 것으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창의적 인간이란 은유적 인간이다.

'은유'한다는 것은 새로운 것,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다.


이 연결, 즉 은유를 누가 하는가?

'나'라는 주체가 하는 것이다. 내가 하는 것이다.

당신은 은유할 수 있는 동력을 내면에 가지고 있는가?


지식을 쌓는 이유는 확장된 영토 속에서 살기 위해서 가 아니라

그 지식을 통해 나의 영토, 나의 세계를 확장하기 위해서다.


나는 지식 생산자인가?

한국은 지식 생산국인가?

다른 사람이 확장해 놓은 지식을 갖다 사용하는 사람은 자유인이 아니다.

그렇다면 지식의 생산이란 무엇인가?


현존하는 모든 지식은 어떤 문제를 해결한 '결과물'이다.

지식의 생산이라 문제를 발견하는 것이다.

문제를 발견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문제를 해결한 결과물(즉 지식)을 습득할 뿐이다.

지적 활동이란 다른 사람이 문제를 해결한 결과물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문제인가를 발견하는 것이다.


배운다는 것은 이미 만들어진 해결 방법들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것이다.

이미 만들어진 해결 방법(즉, 정답)만 습득한 사람은 그 정답(?)만이 적용되는 세상만 살 줄 안다.

현재의 세상이 자신이 습득한 해결 방법, 즉 정답이라는 것에 부합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지식 수입자, 지식 종속자들의 가장 열심히 하는 일은 '정답'을 찾는 일이다.

다른 사람이 만든 결과물의 습득에 더 치중하는 것이다.


지적으로 탁월한 사람, 자신의 제한적 영역을 벗어나려는 사람, 즉 진정한 지식인은 문제를 발견하는 사람이다.

문제를 해결하고 무언가를 치료하려는 사람의 지적 행위는 나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도 적요되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는 측면에서 기본적으로 윤리적이며 공적이다.


하지만 만들어진 해결책만을 습득해서 그것을 적용하려는 사람들(예를 들면 암기를 통한 지적 습득한 사람들)은 전혀 공적이지도 않고, 윤리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위에서 말한 윤리적 공적인 학습을 할 경험이 적기 때문이다.

지적 진보가 일어나는 나라를 일반적으로 선진국이라고 부른다.

왜 선진국에서는 지적 도전이 활발하고, 더 윤리적이며 공적 헌신성이 더 높은 것일까?

그것은 지적 활동을 통해 윤리적 공적 헌신성이 더 함양되기 때문이다.


안다는 건 무엇인가? 안다는 건 배워서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안다고' 한다.

하지만 종속적 암 속에 빠진 사람들(예를 들어.. 이미 존재하는 지식을 습득한 사람)은 남이

창조한 것을 습득하여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안다고' 믿는다.


그런데 이미 있는 것을 습득하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 만들어낸 결과를 습득하는 것임으로 과거지향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있는 것을 안다는 것은 '안다는 것'이 아니다.


안다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지식을 습득한 지적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모르는 것을 찾으려고 발버둥 치는 행위가 하나의 덩어리로 존재할 때 비로소 '아는 것/앎'이 된다.


아는 것을 바탕으로 모르는 것을 찾으려고 발버둥 친다는 것은.. 자신의 (무지의) 영역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것이다. 즉 은유하려고 하는 것이다. 어떤 지적 시도가 계속 일어나는 곳(나라)은/는 아는 것을 바탕으로 모르는 영역 밖으로 넘어가려는 시도나 많이 일어나는 곳이다.


반면 이미 형성된 지식을 수입해서 사는 곳에서는 수입한 그 지식을 이해하면 아는 행위가 끝나 버린다. 따라서 지식 수입국에서는 아는 것을 바탕으로 모르는 것으로 넘어가려는 시도가 일어나지 않는다. 지식 수입자는 모르는 것으로 넘어가기를 두려워하는데.. 왜 두려워할까? 왜냐하면 아는 것 속에서 사람들은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는 것은 무섭고 두렵다. 따라서 고정된 지식, 수입된 지식을 습득한 사람은 항상 안정/안전을 추구하게 되고, 견적이 분명하게 나와야 한다.


안다는 것, 배우려는 것은 모르는 영역으로 넘어가려 할 때 발생하는 불안함과 두려움을 감당하는 사람이다. 불안함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는 행위를 우리는 용기라고 부른다. 용기를 발휘하여 모르는 영역으로 넘어가는 것을 모험이라고 한다.


우리가 영토를 확장하고 지식을 생산하여 생존력을 증가시키는 일이 지식 차원의 일인가? 절대 지식 차원이 아니다. 그것은 (모험을 하는, 도전을 하려는) 용기의 차원이다. 과학은 도전이라는 말은.. 모든 지적 활동은 도전이라는 말과 같다. 생존력을 증가시키려는 모든 활동은 도전이다.


인간을 지적으로 탁월하게 만드는 것은 지식 범위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문제, 즉 용기가 있느냐 없느냐, 모험을 감당하느냐 못하느냐가 그 사람의 지적 탁월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어떤 활동/일/무엇을 하려고 할 때, 그것이 성공할 가능성이 있느냐 없느냐, 가능하냐 가능하지 않는가의 질문에 왜 집착하는 것은 지식의 수입자의 역할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익숙한 것에서 익숙하지 않는 것으로 넘어가려는 그것을 우리는 '꿈'이라고 부른다. 수준 높고 낮음을 구분하는 기준은 '장르'의 유무성이다. 장르란 어떤 것을 시작해서 일정하게 이루는 범위를 장르라고 한다. 바로 그 장르가 개인 속으로 들어오면 '꿈'이 되는 것이다.


꿈이 가능할 것 같다면 그것은 꿈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좋은 계획이다. 꿈은 불가능해 보일 때 비로소 꿈이 된다. 꿈은 익숙한 이 영토에서 불안하고 험난한 영토로 넘어가는 것이다. 저 영토의 꿈이 이 영토의 문법으로 해석되는 꿈은 좋은 계획일 뿐이다. 왜 좋은 계획에 빠지는가? 그것은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계획적으로 살고 있나, 꿈을 꾸고 있는가? 나는 어떤 꿈이 있는가? 나는 어떤 꿈이 있었던가? 내가 꾸었던 꿈은 어디에 있는가? 내가 꾸었던 꿈은 왜 내 곁에 없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은 자신을 지적 탁월성으로 인도하게 될 것이다.


합리적 계산, 안전한 곳에는 꿈이 있을 수 없다. 합리적 계산, 안전한 곳의 '나'는 고갈되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고갈된 자신은 계속 정답을 찾을 것이고, 계속 안전과 편안함을 추구할 것이다. 불안을 감당하지 않고, 도전하지 않을 것이고 꿈이 사라져도 충격을 받지 않을 것이다.


가끔 학생들(사람들)은 묻는다. 나는 무엇을 하면 좋겠냐고 묻는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와 무엇을 하면 좋은지를 남에게 묻지 말고,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고 말해준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는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인생은 곧 탐험이다. 모험을 감당하는 수밖에 없다. 짧은 인생 자기로 살다가는 길은 그 길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상으로 영상의 정리를 마친다. -.-;; 힘들다. 추가로 그의 다른 강영도 참조하기를 추천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https://youtu.be/JLQR3SjCg8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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