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ober 19, 2014

한계
limit



공병호의 초콜릿이란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고 한다.

남아메리카의 강에 사는 육식어 피라니아를 수조에 넣고 이런 실험을 했다고 한다.
피라니아가 먹으를 받아먹기 위해 수조 한쪽 끝으로 몰렸을 때,
수조의 한가운데를 투명한 유리판으로 막는다.

식사를 끝내고 반대쪽으로 헤엄쳐 가려던 피라니아는 투명한 유리판에 부딪힌다.
처음에 피라니아는 끊임없이 돌진하지만 번번이 고통만을 얻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차츰 환경에 적응하게 되고, 유리판을 향해 돌진하기를 멈춘다.

몇 주일 후 유리판을 치워버려도 피라니아는 예전처럼 자유롭게 헤엄치려고 하지 않는다.
수조 가운데쯤 가다가 자진해서 돌아온다. 그들이 말을 할 줄 안다면 투명한 유리판 앞에서
"여기가 끝이야, 나는 여기서 더 갈 수 없어, 더는 못 가!" 라고 외칠지도 모른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나이를 한 살씩 먹어가면서 사람들은 대부분, 스스로가 정한 한계에 점점 익숙해져간다.
익숙한 곳을 벗어나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일 자체를 두려워한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말라고 강요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자신이 알아서 스스로의 한계를 정하는 것이다.


***

이 글을 읽으면서 문득
나이먹은 다는 걸 적절히 비유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계를 정하게 만드는 강요에 대해 잠시 생각에 잠겼는데.. 참 이래저래 웃기는 짬뽕스러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글에서처럼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말라고 직접적으로 강요하는 사람은 없을지 모르지만
분명 대한민국에서는 간접적으로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자신의 꿈을 쫒다가 쪽박찬 사람,
어설픈 직장에 취업을 하고 결국 추구하지도 않는 그 직장이란 것에 묻히는 것보다 자신이 희망하는 것을 추구하는 백수를.. 그저 한심한 인간으로 낙인찍는 걸 보면 분명 스스로 한계를 짓는 것도 있겠지만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그 한계를 간접적으로 강요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일정한 나이에 그 "경계"를 벗어나려 시도하거나, 벗어난 사람은 어리석은 대중으로 부터
"그 나이에 잘하는 짓이다" 라는 식의 조리돌림을 당하거나 가장 위로와 위안이 되어야할 가족에게서 조차 비난을 받는다. 이 무슨 슈밥스러운 시츄에이션이란 말인가.

남을 탓하거나 사회에게 탓을 하자는게 아니다. 우리는 적어도..한 개인이 스스로 경계와 한계를 짓지 않게 하려면 익숙한 곳을 벗어나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사람, 즉 그 개인을 나무라지 말아야 한다. 나이 혹은 사회적 물질적 지위(?)에 상관없이 말이다.

개인의 책임이 클 수도 있겠지만..과연 모든 책임이 개인에게만 지워져야 하는 것일까...?
개인에게 책임을 묻고자 한다면 우선 사회는 공정하면서도 평등하게 각 개인이 한계를 짓지 안을 자유를 사회적 심리적으로 보장해야 하지는 않을까..? 사회가 완벽하게 보장하지는 못하더라도 납득할 만큼은 되지 하지 않을까..?

스스로 한계짓는 사람은 그나마 깨우쳐 변화시키기라도 할 수 있지만 한계를 강요하는 사회는 그 대상이 모호하여 변화시키기가 젖나게 힘들기에 문제가 더 심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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