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막말 - 정양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놓고 간 말
썰물 진 모래밭에 한 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씩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정순아보고자퍼죽껏다씨펄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 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 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다
저만치서 무식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얼음 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
오래전 봤던 시를 다시 만나니 반갑다.
나는 이 시가 사랑을 아주 잘 나타낸 시라고 생각한다.
누가 바닷가에 막돼먹은 고백을 써놓고 갔나 보다.^^
'시펄' 근처에 어지럽게 찍힌 발자국이
글쓴이의 심경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듯하다.
투박하지만 소박하고 솔직한 저 고백을 두고
상스럽고 띄어쓰기 철자법 투성이라며 태클거는 것들은 밉상이다.
말도 곱고 얼굴도 고우면 좋겠지만
말만 곱고, 얼굴만 고우면 뭐하나
시리디 시린 진심의 통증이 없는데..
사랑도, 인간관계도
겉과 속을 구별할 줄 아는
똥과 된장을 가려낼 줄 아는
혜안이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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