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mber 10, 2018

역사의 순간 한국일보 특종 사진 1987

6·26 평화대행진이 벌어진 부한 문현로터리에서 웃옷을 벗은 한 시민이
"최루탄을 쏘지 마라"라고 외치며 다탄두 최루탄을 발사하는 경찰에게 달려가고 있다.
한국 민주화의 상징적인 이 사진은 1999년 AP가 선정한 20세기 100대 사진에 포함됐다.
사진의 주인공은 찾아지지 않았다.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거행된 5월제 개막식 도중, 농대 원예과 이동수 군이
학생회관 4층에서 온몸에 불을 붙인 채 '미제는 물러가라''경찰은 물러가라'
를 외치며 투신하고 있다. 분신자살은 이후 대학가에 열병처럼 퍼졌다.
이 사진은 계엄령 하에서 보도되지 못하다가 외신으로 먼저 보도돼 세상에 알려졌다.


민민투결성식을 마친 중앙대 학생들이 후문으로 진출,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저지하자
 화염병과 돌을 던지며 격렬하게 맞섰다.
학생들이 던진 화염병이 경찰의 몸에 맞아 불이 붙어 뒹굴고 있다.


이한열 군이 최루탄에 맞아 입원 중인 15일 하오 3시 연세대에서 최루탄 추방 궐기 대회가 열려
민주광장에 4천여 명의 학생. 시민들이 모인 가운데 진행되었다.
집회가 끝난 후 많은 학생들은 교문 밖 진출을 위해 미리 대치돼 있던 진압경찰과
밀고 밀리는 과정을 번복하였다. 교문 주변의 담벼락 철책을 뜯어내어 방석망을 쳐놓은 전경들에게
교련복을 입은 학생 1명이 쇠막대기를 휘두루며 학우를 살려내라고 울부짖고 있다. 

출처: 역사의 순간 한국일보 특종 사진들
http://blog.daum.net/lhp2447/14301 

***

세상에 거저 얻어지는 공짜가 없음을 실감하게 된다. 누가 강요하는 것도 아닌데 부채의식을 갖게 된다. 좀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자기 재산 털어놓고, 목숨도 버려가며 독립운동한 사람들과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수많은 왜구와 오랑캐들의 침략에서 이름 없이 민초들을 생각하면 부채의식을 갖게 되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타인을 위해, 혹은 공공의 선을 위해 고통을 감수하고 목숨을 잃거나 버린 사람들과 그로 인해 빈곤할 수밖에 없었던 자식들과 후손들이 있는 반면.. 침략자들에게 협력하여 대대손손 호가호위를 누리는 사람들을 보면 인간으로 산다는 건 무엇인지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전우용] 서울 동대문에서 청량리로 가는 길의 이름은 ‘왕산로’입니다. 왜 왕산로인지 아느냐고 물으면 십중팔구는 “주변에 왕산이라는 산이 있어서 그런 거 아냐?”라거나 “산으로 가는(往) 길이라 그런 거겠지”라고 답합니다. '왕이 산책하던 길이라서'라고 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왕산’은 대한제국 평리원 재판장 서리 - 현재 직위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굳이 하자면 대법원장 서리 정도에 해당합니다 - 등을 지내고 의병에 투신했던 허위의 호입니다. 1908년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 작전 때 허위가 선봉장이 되어 동대문 인근까지 진격했기 때문에, 그 길에 왕산로라는 이름을 붙인 겁니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덕에 의병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지만, 왕산로를 자주 다니는 사람 중에도 그 길에 의병의 자취가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많습니다.

허위가 순국한 후 그의 제자이자 대한제국 평리원 판사였던 박상진이 김좌진 등과 함께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고 인근 부호들에게 군자금을 모집합니다. 당시 구미 칠곡 일대의 제일 가는 부자는 장승원이었는데, 대한광복회는 그에게 군자금을 요구했다가 거부하자 사살했습니다. 이에 앞서 장승원이 허위에게 거액의 뇌물을 주었으나 허위가 나라를 위해 긴히 쓸 때가 올 테니 그때 찾아 가겠다며 맡겨 두었고, 박상진이 이 돈을 찾으려 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박상진은 이 사건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순국했습니다.

울산 출신 박상진을 존경했고 그를 본받아 의열단을 조직한 사람이 영화 ‘암살’에도 나오는 옆 동네 밀양 출신 김원봉이었습니다. 일제 경찰이 그토록 죽이고자 했으나 무사했던 김원봉인데,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서 경찰에 체포됩니다. 그를 체포한 자는 친일 경찰로 악명 높았던 노덕술, 체포하라고 지시한 사람은 당시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이었습니다. 장택상은 장승원의 아들이자 일제강점기 중추원 참의를 지낸 초특급 친일파 장직상의 동생이었습니다. 부하들이 전 의열단 단장이자 임시정부 군무부장이던 김원봉을 체포했다간 말썽이 생길 거라고 만류했지만, 장택상은 “아버지를 죽인 불구대천의 원수 일당을 어떻게 두고 볼 수 있나?”라며 강행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장택상이 국회부의장일 때 그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한 사람이 김영삼 전 대통령입니다. 의병전쟁이 아주 옛날 일 같지만, 겨우 110년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도 왕산 허위 등의 의병에 관한 기억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장승원 등 친일 부호와 관련된 사람들의 네트워크와 가치관은, 아직 살아있습니다. 한국에서 일본 우익과 같은 보조를 취하는 정당이 아직 강력한 건, 이 때문입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