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ust 10, 2024

분노와 증오에 삼키우지 않을 것 - 이주혁

 <분노와 증오에 삼키우지 않을 것>

2015년 영화 '암살'을 보면 독립군을 배신한 역할로 나오는 이정재에게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이 총을 겨눈 채 묻는다. 왜 배신자가 되었느냐고.

그러자 그가 한 대답은 이런 것이었다. "몰랐지, 일본이 망할 줄은...."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이 변절자가 되고 어떤 사람은 꿋꿋이 버텨 나가는지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우리가 쉽게 기억해 낼 수 있는 이름들, 예컨대 김 ㅈㅎ, 김ㅁㅅ, 진ㅈㄱ같은 사람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혁명, 진보 운동에 투신하다 어느 시기에 그 방향을 180도 틀어버린 사람들이다.

반면 노회찬, 유시민, 조국처럼 세월이 흐름에도 그 뜻을 일관되게 꺾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사이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낙천성과 믿음이 그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염석진 역으로 나온 이정재는 절망과 불안 속에서 변절을 택한다. 노덕술 같은 사람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뜻을 꺾지 않은 이들은 우리가 언젠가는 일본으로부터 독립하여 일어설 것이라는 걸 추호도 의심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건 단지, 낙천적 상상력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사람을 옳은 방향으로 끌고 나간다고 생각한다.

앞서 변절자로 언급했던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런 '낙천적 믿음'을 잃었을 것이다. 변혁이란 오래 걸리는 일이다. 그러니 활활 타오르는 분노나 증오가 변혁의 추동력은 될 수 없다. 그보다는 순백의 꿈과 소망, 그리고 믿음이 바로 더 큰 힘일 것이라 생각한다.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 공원에 가면서 자신의 시계를 풀어주며 김구 선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의 시계가 많이 낡았습니다. 저에게는 이 시계가 곧 필요 없어집니다. 그러니 이것을 드리겠습니다."

젊디젊은 나이에 돌아오지 못할 곳을 향해 떠나면서 이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서는 단 한 점의 그늘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의사는 무엇을 위해 자기의 젊은 목숨을 이렇게 바칠 수 있었던 걸까. 그건 조국이 끝내 독립할 것이라는, 낙천적이고 소탈한 믿음과 희망을 쥐고 있어서가 아닐까.

법원이 나경원, 김건희, 손정우. 이런 사람들에게 영장을 통으로 기각하고 있다. 범법자들일 가능성이 농후할 텐데도 검찰은 수사할 의지가 없고 법원은 대충 넘어간다. 그리고는 선량한 사람들에게는 징역 7년을 구형하더니, 국민 세금으로 받은 돈은 쌈짓돈처럼 물 쓰듯 썼으면서도 뻔뻔스럽게 얼굴을 들고 활보한다.

정치인이 될 수 없는 사람이 여론조사상 1위 후보로 등재되기까지 한다. 이런 꼬락서니를 보며 많은 분들이 분노하고 계시는 것 같다. 우리는 고생고생을 다해 권위주의의 구 체제를 무너뜨렸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아직도 이곳저곳에 탄탄히 뿌리를 박고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끝내 완성하려 한다면, 우리는 좀 더 꿈꾸어야 한다. 미국의 새로운 부통령 당선자 카밀라 해리스가 확정 당일날 밤 이렇게 연설한다.

"민주주의는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민주주의는 우리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울 의지만큼, 딱 그만큼만 강력한 것입니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지키고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민주주의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싸워야 하고 희생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속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또한 진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국민들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들 힘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부통령직을 수행하는 첫 여성이지만, 제가 마지막은 아닐 것입니다."

그도 차별받는 아시아인, 유색인종, 여성으로서 늘 자기 머리 위의 유리 천장을 보며 좌절해 왔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존재가 시사하는 바는 분명하다. 꿈을 꾸고 확신을 가지는 것이 생명이라는 것. 지금 여기 우리의 시민들 역시 그러실 것으로 믿는다.

출처: https://www.facebook.com/lee.joohyuck.9/posts/3033333716768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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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위의 글이 나름 괜찮은 글이라고 생각되며 한 번 읽어 보기를 권장한다. 한데... 위 글을 읽고... 약간의 질문이 생겼다.

글쓴이는 "낙천적 믿음"의 유무에 따라 '변절'의 선택 여부가 갈라진다고 했다. 즉, 어떤 사람이 낙천적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서 '변절'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한데... 어떤 사람이 낙천적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어떤 사람은 그 "낙천적 믿음"을 가지는데... 왜 어떤 사람은 그것을 갖지 못하는(혹은 갖지 않는) 것일까? 라는 질문이 아닐까 싶다.

대체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지구상의 모든 각각의 개인들은 모두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즉, 모든 개인은 일생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교육의 정도가 다르고, 가정 및 사회적 환경/여건 등이 다르며, 배우고 익히는 것이 다르고, 이해력도 제각각이며, 사고력, 논리력도 모두 다르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은 마치 사전에 결과를 알 수 없는 뽑기와 같다. 어떤 사람이 변절을 할지 안 할지, 나라를 팔아 먹을지 않을지는 오직 결과적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글쓴이는 민주주의를 완성하려면 "우리는 좀 더 꿈꾸어야 한다"라고도 했다. "꿈꾸어야 한다"는 것은 추구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한데... 진정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이 완성(?)이라는 단계에 도달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민주주의 시스템 자체가 본질적으로 한계성을 가지고 있는데 말이다.(세상의 모든 그 어떤 제도나 이념도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그리고 행여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이 완성될 수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완성하는 주체는 결국 인간/사람인데... 위에서 언급했든 모든 각각의 사람들이 다 다르고, 또 새로운 변절/악/부정/부패는 끝없이 또 태어나는 데... 과연 '완성'이라는 것이 가능하겠냐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결국 지금 현재의 어떤 믿음, 이념, 제도, 시스템, 현상, 인물 등은 어떤 시간적 간격(ex: 몇십 년 주기, 혹은 몇 백 년, 몇 천년 주기 등)으로 출현했다가 사라지고를 반복할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물론 형태나 모양을 조금씩 달리하면서 말이다.) 즉, '선'과 '악'이 영원히 주도권을 갖기도 하고, 잃기도 하며 서로 함께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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