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ruary 14, 2026

하종강 교수님께서 어머님과의 작별을 앞두고 쓰신 글...

 하종강 교수님께서 어머님과의 작별을 앞두고 쓰신 글

올해 100세인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셨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셔야 할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이 글을 쓴다. 법률방송과 3차례의 인터뷰를 했을 때, 아나운서가 “학생운동을 결심하게 되는 과정에서 어머니 영향이 컸다면서요?”라는 질문을 했다. 그 얘기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대학 1학년이었던 74년, 결정적 결단을 앞두고 나는 작고 어두운 내 방에 들어가 하루 종일 뒤척이며 나오지 않았다. 잡혀가거나 고문을 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 20년 동안 가꿔왔던 ‘가문의 꿈’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 나를 더 망설이게 했다. 씻지도 않은 채 이불을 뒤집어쓰고 뭉갰다. 어머니가 이따금 내 방문을 열어보시고는 아무 말 없이 닫으셨다. 그렇게 사흘째 되던 날 아침 밥상머리에서, 중학생이었던 여동생에게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오빠가 지금 하고 있는 고민의 내용을 이 엄마는 잘 모른다. 너도 역시 잘 모르겠지. 그렇지만, 우리는 오빠가 지금 세상을 바르게 살기 위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해하자. 바르게 산다는 게 결코 쉽지 않은 세상이구나… 오빠의 고민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가족으로서 최소한 그렇게라도 이해하자.”

그리고 잠시 뒤 이어서 말씀하셨다. 밥솥에서 밥을 푸시던 어머니의 모습까지 기억에 생생하다.

그런데 그동안 엄마가 세상을 바르게 살라고 가르쳤잖아. 그렇게 가르쳐 온 어미로서… 이번에 오빠가 어떤 결정을 하든, 나는 아무 말 하지 않기로 했다.

그 말을 내 얼굴을 보지 못하신 채 동생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한 격려를 받고도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면 얼마나 비겁한가? 며칠 뒤 나는 선배들과 함께 여관방을 빌려 이틀 동안 꼬박 등사기로 밀어낸(‘등사기를 민다’는 표현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몇이나 있을까. 생각해 보면, 그때는 참으로 ‘원시시대’였다) 유인물 뭉치를 라면박스에 싸 들고 학교로 들어가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학보사 기자가 찍어 준 그날의 사진이 기록으로 남았다.

그날 저녁, 나를 연행해 가던 형사는 차 안에서 “야 인마, 손에 묻은 등사잉크라도 좀 지우고 잡히든지…”라고 혀를 찼다. 연행된 7명의 학생들 중에서 유일한 1학년이었던 나는 “1학년밖에 안 된 놈이 뭘 안다고 까부냐?”는 이유로 ‘간첩 잡는’ 형사들에게 숱한 손찌검을 당하며 대공분실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새로운 인생의 분기점에 섰다는 감격으로 눈물지었다.

평범한 가정주부인 어머니가 어떻게 아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을까?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것이 궁금했다. 돌이켜 보면 어머니에게는 그런 신기한 기억들이 몇 가지 있다. 밴댕이처럼 잔가시가 많은 생선이 밥상에 올라올 때마다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있다.

“이 작은 생선에 가시가 왜 이렇게 많은 줄 아니? 더 큰 물고기가 잡아먹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야. 가시가 많으면 먹다가 목에 걸릴 테니까…”

한번은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어머니께 물어보았다. “그렇지만 가시가 많다는 것을 아는 것은 이미 먹힌 다음이잖아요?”

어머니가 이어서 말씀하셨다. “그다음부터 동료들을 먹지 않잖아. 자기는 죽지만 동료들을 살릴 수 있잖아. 그게 바로 ‘희생’이다. 작은 물고기도 그렇게 산다. 자신과 자기 가족만을 위해서 사는 것처럼 천박한 삶은 없다.” 그 똑같은 얘기를 수십 번도 더 들으며 자랐다.

적산가옥의 커다란 창 옆 흐린 전등불 밑에 앉아 구멍 난 양말 속에 알전구를 넣어 짜깁기를 하시면서 “사람은 주변에 좋은 영향을 미치면서 살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던 어릴 적 어머니의 모습이 선명하게 되살아났고, 그날 각인된 어머니의 양말 깁던 모습은 흐릿한 조명과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로부터 13년 뒤인 87년 7, 8월 노동자 대투쟁이 터졌다. 그와 같은 사건은 인류 역사에 다시없을지도 모른다. 87년 7, 8월 두 달 동안 우리나라에서 3,241 건의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전국에서 수천 개의 전투가 동시에 벌어지고 있는 셈이었다. 머리띠를 묶어 맨 수만 명 노동자들이 집회를 벌이거나 거리를 행진하는 모습과 휘날리는 수백수천의 깃발과 현수막의 물결이 두 달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뉴스의 첫머리를 장식했다. 아, 이런 날이 오는구나...

그 무렵 각종 국제회의나 학회에서는 온통 한국의 노동운동이 중심 주제가 됐다. 휴식 시간에는 한국 대표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어떻게 그렇게 놀라운 역사가 가능했는지 설명해달라”는 질문이 쏟아지곤 했다.

그 87년 여름 어느 날, TV 뉴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어머니가 지나가는 말처럼 말씀하셨다.

그동안 말은 안 하고 살았지만, 사실은 내가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조합원이었다. 40년이 넘도록 남편에게도 말을 못 하고 살았지만, 사실은 내가 전평 조합원이었어. 화신백화점 강당을 빌려 대의원대회를 하던 날...”

아, 40년 전의 얘기를 마치 어제 일처럼 자세히 기억하고 계셨다.

그때 같이 활동했던 사람들은 어느 날 아침 한강에서 시체로 발견되고, 간밤에 죽창에 찔려 죽고… 그래도 다들 열심히 했지. ‘6·25 사변’ 때 피난 갔다가 돌아와 보니 노동조합 간부들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지.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모두 다 죽었는데… 다들 똑똑하고, 말 잘하고, 글 잘 쓰고, 잘생기고… 정말 아까운 사람들이었다.

그날 나는 비로소 해묵은 숙제를 풀었다. 어머니가 나에게 수십 번 도 더 해 주신 ‘생선 가시 이야기’ 등은 전평 시절 공부 모임에서 배웠거나 수련회에서 어느 강사가 해 준 강의 내용이었을 것이다. 처녀 시절 은행원으로 일하시며 2~3년 남짓 겪었던 전평 활동의 경험이 어머니의 남은 평생을 규정한 것이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노동운동을 한다는 것은 그토록 엄중한 일이었다. 감히 말하거니와 어머니가 없었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다. 그 어머니가 생을 마감할 준비를 하고 계시다. 고통의 시간이 짧기를 바랄 뿐이다.

출처 :https://www.facebook.com/share/p/1BkpcypgTP/?mibextid=wwXIfr

https://news.nate.com/view/20251231n03685



나의 어머니는 지금 약간의 치매 증상(?)과 고관절 골절 치료, 재활로 힘겨운 시간을 겪고 있다. 나는 어머니에 관한 그럴듯한 혹은 애틋한 기억은 사실 별로 없다.

그럼에도 가끔 노쇠한 어머니의 얼굴(특히 잠든 얼굴)을 넌지시 보고 있으면... 그야말로 만감이 - 아니 형언할 수 없는 어떤 슬픔(?) 같은 것이 밀려온다. 솔직히 그게 무슨 느낌인지 잘 모르겠다. 그저 한없이 불쌍하고, 안쓰럽고 안타까움의 총합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다가도 잠에서 깨어 정신이 들어 고집스럽게 무언가를 주워오고, 쌓아 놓고, 흘리고, 쏟고, 업 지르고, 지리고, 묻히는 것을 보면 복장이 터지고 화가 나기도 한다.

그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이별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실감하게 된다. 그러나 누구나 때가 되면 맞이하는 것이니... 딱히 어찌할 방법은 없다. 그걸 알면서도 마음이 무겁다.

(부처가 아니더라도) 그저 인간의 생로병사가, 인간 삶의 고통이... 참으로 지랄맞은 것임을 새삼 상기할 뿐이다. 그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는 해탈은 그야말로 꿈같은 말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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