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17, 2015


못보신 분들은 다시보기 라도 꼭 보시길..


위 사진은 사건당시 같이 탑승했던 first class 승무원 어떤 분과 사무장의 모습으로
해당 first class 승무원 어떤 분은
거짓진술의 댓가로 사측이 지분을 보유한 사립대학의 교수직을
약속 받았다고 전해지는데
자신의 존엄을 지키고 갑질사건의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사무장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그 교수직 제안받은 여승무원에 대한 검색이 현재 네이버에서만 안되고
다른 검색에서는 집중포화를 맞고 있는 모양이다.

***

이 글은 2015.1.10일 방영된 그것이 알고싶다는 보고 적은 것인데..아마 많은 사람들이 해당 방송분을 보고 씁쓸함을 넘어 분노를 감추지 못했으리라 생각된다.

어쨋거나 최근들어 빈번하게 회자되고 있는 이 "갑질"이란 것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게 한다. 대체 왜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갑질이 끈임없이 발생하는 것일까? 의구심이 안생길 수가 없다. 대체 왜..? 이유와 원인은 뭘까..궁굼하다.(물론 서양에서도 갑질은 있겠지만..동양처럼 심각하지는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왜 대한민국에서 유별난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소위 그런 갑질스러운 일들이 끈임없이 발생하는 이유의 근저에는 (개인적 사견이지만) 동양적 의식구조, 즉 유교주의가 자리하고있다고 생각된다. 아니..유교주의 뿐 아니라 봉건적, 전근대적, 수구적 의식구조라고 해도 좋다. 아니면 충효주의라고 해도 좋다. 그것도 아니면.. 그런 모든 것을 통들어서.."과거지향적 인식구조" 혹은 "전통적 의식구조" 또는 "그런것들에 대한 어떤 믿음"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그런 과거지향적, 전통적(?) 의식구조와 인식구조는 윗사람에게, 나이많은 사람에게, 윗사람에게, 상사에게, 부모에게, 선생에게..무조건적 맹목적 복종이 미덕임을 가르쳐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들은 지난 수백년 혹은 수쳔년간 한국인으로서 당연히 추구해야 할 가치이자 미덕이였으며 윤리였고 도덕이였으며..여전히 대한민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의식이자 인식이고 생각이다.
그런 의식과 인식, 생각에 위배 되거나 반대되는 반론을 갖거나 이견을 가지거나..개기는 행태는 거의 용납되지 않는다. 즉, 자신에게 충실하기 보다..타인(윗사람, 부모, 국가, 상사등등)에게 충실한 것을 가치이며, 윤리고 도덕이며 미덕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헌데..과연 그러한 의식, 인식, 생각이 작금의 시대와 미래의 시대에 과연 합리적인 설득력을 가질 것인가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좀 회의적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그런 "과거지향적 인식구조 혹은 전통적 의식구조"라는 질병과 가난, 역경과 굶주림을 이기고 현재의 풍요로움을 이룩했음을 지금의 사람들(ex:젊은이들)에게 널리 고취시켜야 한다고 말이다. 일부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풍요로움이란 단순히 물질적인 측면에서만 그러하다는 것이며(정신적 풍요로움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 지금까지 그러했으니..앞으로도 그러해야 할 것이고, 그러해야 한다는 식의 믿음은 설득력 없음이 최근 일고있는 갑질 사건들을 통해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왜 과거에는 적용 가능했던 그 "가차 혹은 믿음"이 현재에는 적용 불가능할까? 그것은 시대가 변했고 환경이 변했고 사람이 변했고 사람들의 생각이 변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변하고 있고, 또 변했다. 변해도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급속하게 변하고 있다. 구조와 형태..그리고 물질등이 변하면 그 구조와 형태와 물질이 가지고 있던(혹은 내포하고 있던) "가치와 의미"도 변하기 마련이다.(아니 변해야 한다.)
주판에서 컴퓨터로 변했고, 한자에서 한글 혹은 영어(좀 있으면 중국어로 변하겠지)로 변했다. 초가집에서 아파트로 변했고, 왕에서 대통령으로 변했으며, 신하에서 국회의원으로 변했으며, 종이에서 디지털로 변했고, 백성에서 국민으로 변했다.

하지만 그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또는 쇠뇌적 학습에 의해 여전히 전통적 과거적 인식구조와 생각방식에 함몰되어 과거적 시각과 방식으로 현재와 미래를 해석하고 이해하려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주판을 추억하고 그리워해서 굳이 주판을 사용하는 것은 좋다. 다만, 그것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컴퓨터 시대의 사람에게 주판 시대의 방식을 강요하는 것은 컴퓨터시대를 살아야하는 사람을 바보로 만들거나 세대간의 충돌만 야기할 뿐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굳이 주판을 쓰겠다는 사람에게 컴퓨터를 쓰는 사람이 뭘 어쩌겠는가..쩝.)

암튼 위 그것이 알고싶다 방송을 보면서, 또 최근 이런저런 뉴스를 보면서..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갑질논란 사건들을 통해 생각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면 아마 이런 것이지 않을까 싶다.
아돌프 아이히만(Karl Adolf Eichmann)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 및 독일 점령하의 유럽 각지에 있는 유대인의 체포, 강제이주를 계획 ·지휘하였다. 독일의 항복 후 가족과 함께 아르헨티나로 도망하여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가짜 이름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 근교의 자동차 공장 기계공으로 은신하고 있다가 1960년 5월 이스라엘의 비밀정보 모사드에 의해 체포당하여 이스라엘로 압송되었다. 1961년 12월 예루살렘의 법정에서 대전 중에 나치스 독일이 저지른 유대인 600만 명의 학살 책임을 추궁당한 끝에 사형판결을 받고 1962년 5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6백만명을 이슬로 사라지게 한 사람답지 않게 지극히 평범하고 순박하하기까지한 외모를 가진 그는 아이히만의 재판이라고 부르는 재판에서.. 그는 자신이 행한 일은 오직 국가/정부의 명령에 따라 충실히 자신의 일을 수행했을 뿐이라고 항변 했다고 한다.(지식백과)

이 재판을 통해 한나 아렌트는 중요한 철학적 질문을 하게 되고 악의 평범성이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희대의 살인마, 절대악만 악이라고 생각하지만 진짜 더 악한 것은 무능함 자체다.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 생각하지 않는 모습 바로 그 자체가 악이다.이게 악의 진부함이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을 낳고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한나 아렌트


최근 뉴스를 통해 알게되는 이런저런 갑질행태에 대한 이유와 원인 혹은 까닭에 대해 생각 하면서..결국 그것의 정체는 대한민국이라는 사회가 지난 수백년 혹은 수천년간 진화해 오면서 형성된 과거적 형태의 인식체계 또는 생각의 방식 또는 그런것들에 대한 어떤 믿음(ex:유교적, 봉건적, 전근대적 의식)이 복종을 미덕으로 여기고 수직적 "상하구조"를 만들어 기형적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며.. 그 갑질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그 갑질로 야기되는 문제시 그것을 통해 자신의 테두리...즉 예컨데 자신, 가족, 국가, 민족이라는 테두리 이익을 위해 정당화 하는 것이 그 이유 혹은 원인이 아닌가하는 생각에 까지 미치게 되는 것이다.
간혹 또는 종종.. 지극히 서민인 사람들이 자신보더 더 하위(?)에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게 취하는 행동을 보면 그런 생각은 증거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은 뿌리깊게 박혀있는 수직적 상하구조에서 유래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유교주의를 딱히 좋아하지 않는데..그 이유 중 하나는 유교주의같은 동양적 의식에는 기본적으로 수직적 구조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데..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를 수직적 상하구조로만 이해하고 해석하려 한다는 것이다. 예를들면 이런 것이다.

나이먹은 사람과 나이 적게 먹은 사람
어른과 아이
남자와 여자​
선생과 학생
부모와 자식
​국가와 국민
왕과 신하
조직과 구성원
선비와 상업인
화이트와 블루
고용주와 피고용인
기타등등​...

위에서 보는 것과 같이 위와 같은 구분(A와 B)에는 필연적으로 유무형의 어떤 "갑(A)"과 "을(B)"의 관계가 존재한다. 즉 (A는 B보다 위에 있다는 식의) 수직적 상하구조가 존재하는 것이다. 유교적 관점에서는 당연히 "갑"을 더 중요시 하고 우선시 하며 더 큰 존엄성과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다. ​최근 뉴스에서 보여지는 여러가지 갑질의 근본적 원인중 하나가 바로 이 수직적 상하구조에 근거한 계급의식인데..그 뿌리에 바로 유교적 전근대적 봉건적 전통적 의식구조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유교주의 혹은 봉건적 의식은 ​더이상 현대 및 미래에 걸맞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믈론 말장난을 하자면 유교주의도 사람을 귀하게 여겼으며 수평적 인간관계를 주창한다고 하겠지만 그야말로 말장난일 뿐이다.
예상컨데 이 수직적 상하구조에 근거한 뿌리깊은 수직적 상하구조식 계급의식과 유교적 전근대적 봉건적 전통적 의식구조가 사라지지 않는 한..소위 갑질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제아무리 "을"일지언정 "갑"의 위치에 설때..그 "을"은 갑질을 서슴치 않을 것이다.

이 갑질문화(? 이걸 문화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으나..개념적으로 사용한다.)는
어느 특정계칭이나 특정인의 문제가 아니다.
전반적으로 동양적 이념에 찌든 대중 다수의 수준 혹은 국민성의 문제일지도..

고객들의 갑질백태

갑질 어디까지 당해봤니..?

대한민국에서 정직하게 살면 좋다고..?
그러한 전통적 기차관에 의해 알아서 엎드려져야 한다는 복지부동의 자세가 만연하게 되어..급기야 부정과 부패(그리고 부조리와 모순)가  정의와 반부패 보다 더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간혹 정의나 반부패, 부조리와 모순을 지적하고 개선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살기도 바쁜데 피곤하게 뭘 그렇게까지.." 또는 "그런 당신은 얼마나 정의롭고 깨끗하냐고.." 또는 "네 떵 굵다, 잘났다" 또는 "네 앞가림이나 잘하라" 또는 "좀 조용히 살았으면 좋겠다" 라고 말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정의와 반부패, 부조리와 모순을 말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말하는 만큼 자신이 정의롭고 깨끗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자신의 말처럼 정의롭게 깨끗하면 좋겠지만..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의와 반부패를 말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핵심은 (그 자신 뿐 아니라 우리 자신들이) 자신과 각 개인이 얼마나 정의롭고 깨끗한지가 물리적으로 측량하여 가늠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반추하며 돌아고보 각 개인 자신의 내면적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는 것이 목적이며 취지인 것이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자신의 자유를 일시적 안전을 위해 파는 사람은 안전과 자유를 얻을 자격도 없고, 둘 다 잃게 될 것이다."라 말했다고 하지만..그러나 현실에서는 언제나 배부른 "돼지"가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이긴다.
일반적으로 돼지가 소크라테스를 이기는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존에 가졌던 생각, 의식구조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며, 독일 하이만의 케이스처럼 각 개인은 그저 자신의 일에 충실했을 뿐이고.. 당장 식구를 먹여 살리고, 오늘을 먹고 사느라 어쩔 수 없었노라는 당위성을 제시함으로써 스스로를 구원 받고자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극소수의 진보적 개혁가(혹은 혁명가 또는 발전하려는 진보주의자)에 의해 발전하다. 사회를 발전시키기위해 그 극소수의 사람 혹은 개인은 힘겨운 싸움을 하기도 하고, 억울함과 고통을 받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기도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해서 발전시킨 "결과의 열매"는 다수의 대중에게 돌아가지만..안타갑게도 대중은 그 소수의 개혁가 혹은 혁신가 혹은 진보주의자의 수고를 기억하지 않으며..심지어 그 "결과의 열매"가 신이 준..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자신의 권리로 인식한다.
위에 언급되었던 아이히만의 사례와 마찬가지로..그리고 일련의 반복되는 갑질사건들과 그것들이 처리되는 진행과정을 통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나 "자신에 대한 물음"이다. 예컨데 먹고사는 문제가 매일의 숙명인 일상속의 일과 직업 또는 사회속에서 부당한 일, 업무, 지시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인간의 가치와 존엄에 대해 생각할  수 있으며..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얼마나 지구의 보편적 가치와 정의에 부합할 수 있을지에 대한 자문이며, 기존의 과거적 가치에 대한 의문제기인 것이다.

또한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성찰이며 반성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러한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일단은 나 자신부터)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지금것, 경험 혹은 역사를 통해 비춰볼때..배부른 돼지가 되고자하는 욕구가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지가 하는 욕구를 항상 이겼음으로..실천이 어려운 문제다. 인간 역시 동물이고..그래서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먹고 살아 있어야..이성이나 생각도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수없이 반복되는 생각과 질문은 어느순간 깨달음을 경험(직접경험이건 간접경험이건)​하게 한다. 그 순간이 바로 소위 말하는 aha moment인 것이다. 그 "aha  moment"를 한 순간이라도 경험한 사람은.. 앞으로도 더 나은 인간으로의 발전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며..그러한 깨달음의 순간을 많이 경험할 수록 더욱 진화하는 개인으로 탄생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것이 알고싶다 ] 클로징 멘트
우리에겐 부끄러운 시절이 있었습니다. 오로지 경제 성장을 위해 온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산업 역꾼이 됐던 그 때, 먹고 살 일자리를 주던 재벌기업에겐 웬만한 편법과 반칙이 있더라도 쉽게 눈감아 주곤 했던 그 시절 말입니다.

그때 그들에게 잠시 도덕과 윤리를 접어두었던 것이 오늘날 일부재벌과 그녀들의 자녀들을 모두 상식과 규칙 규칙 위에 군림하는 무소불위의 갑을 만든 건 아닐까요?

그리고 반칙이 생겼을때 그것을 눈감아 준 정치권과 사법기관, 언론도 결코 이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할 겁니다.

우린 지난 20여년 동안 재벌 일가가 저지른 범죄의 뒷얘기를 알아보면서 우리 사회가 아직도 같은 잘못을 계속 반복하고 있음을 뼈아프게 확인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잘못은 마치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갑'들이 끊임없이 상식과 규칙을 무시하는 갑질의 유혹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대한항공의 땅콩 회항사건은 바로 이런 현실에 압축판이었습니다. 박창진 사무장의 고백과 대한항공 승무원의 제보는 그래서 더욱 값지게 느껴집니다.

갑들의 반성 못지 않게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은 결국 이런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용기로 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방송을 하는 도중에 저는 여러분께 이런 질문을 드렸습니다. 만일 이처럼 부당함에 맞서야 하는 선택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여러분들은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혹시 이제 마음의 결정을 하셨습니까? 그것이 알고 싶다는 2015년에도 여러분의 그 정의로운 선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던 와중에 땅콩항공사가 또 사고를 친 모양이다.
근데 그동안 "을"이 였을 승무원들이 이번에는 승객(바비킴)에게
조금 "갑"스러운 행태를 보인 모양이다.
"을"이였던 사람이 "갑"적인 처지에 놓이니 다른 "을"에 있는 사람에게 갑질은 하거나
갑스러운 행동을 한다. 왤까..? 여기서 문득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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