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ember 12, 2015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스들과 스펀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펀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

"풀"이라는 시 보다 이 시가 더 맘에 든다.
왜 작은 일에 분개하는 것일까?
그것은 작은 것에만 분개할 수 있고 하도록 허용되기 때문이다.
큰 것에 분개하면 역풍을 맞거나 댓가를 치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찮은 사람들이 하찮은 사람들에게 ​하찮은 일에 더 악착같아지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인간은 그저 시시하고 하찮은 인간일 뿐이지만
그 시시하고 하찮은 인간이 스스로를 대단한 인간이라고 착각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하지만 안타갑게도 그런 나르시즘에 빠진 사람들 중에
스스로 자신의 보잘 것 없음을, 시시함을 자각하는 겸손의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므로 자기반성이나 스스로를 돌아보는 행위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래서 수천억, 수조원을 해쳐먹은 사람에게는 어쩌지도 못하면서
길거리 허름한 식당에서 간장 한 종지에, 재리상 콩나물 한 움큼에
목숨걸 듯 핏대 세우며 옥신각신하는 것이다.
인간의 형태를 했다고 다 인간은 아닌 것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인간"​이라 함은 무엇으로, 어떻게 정의/규정될 수 있을까..?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