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ember 19, 2015

대중의 분노를 관리하는 세 가지 방식-진중권


아래는 펌글이다. 어느 책에 나오는 구절인가 보다. 사실 진중권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최근 진중권의 글을 자주보게 되는 것 같다. 나중에 책을 함 읽어봐야 겠다.
대중의 분노를 관리하는 세 가지 방식 -진중권
제가 볼 때, 기득권 세력이 대중의 분노를 초래하는 방식에는 세 가지 정도가 있는 것 같아요.

 첫째는 통제할 수 없는 사회적 분노의 방향을 슬쩍 바꿔놓는 것입니다. 그것은 의식적일 수도 있고, 무의식적일 수도 있습니다. 가령 용산 참사의 경우를 보면 아주 의식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누가봐도 공권력의 과도한 진압에 의해 무고한 시민들이 죽은 사건이거든요. 그런데 그걸 어떻게 바꿔놓았냐 하면, 최근에 경찰이 폭행당한 사건 있죠? 물론 폭행당한 건 굉장히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시민 5명이 죽은 것에 비할수 있는 일이 아니죠. 그런데 그걸 부각시켜요. 그리고 유포합니다. 공권력의 위기라는 말로. 그런데 제가 보니까 공권력의 위기라는 말을 쓸 근거가 없어요. 경찰이 폭행당하는 건수는 오히려 줄어들었거든요. 데이터로 입증이 안 되는데 그걸 계속 부각시켜요. "미국 같으면 저건 총으로 쏴 죽인다"는 식으로 대중의 감정을 선동합니다. 공권력의 위기라는 담론을 보수 언론과 정부, 여당이 만들어내면서 선정, 선동을 하는 거죠.
그런 경우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오랜 관리와 통제의 결과 대중들이 자발적으로 선정, 선동되는 경우가 있어요. 대표적인 예가 '황우석 사태'였던 것 같습니다. 황우석 사태의 특성 가운데 하나가 분노의 대부분이 자발적인 것이었다는 겁니다. 권력자들이 생체공학을 통해서 대중의 신체에 아주 오랫동안 각인시켜놓은 두 가지 코드가 있습니다. 하나는 330조라는 화폐로 환산시킨 시장주의 코드. 이게 대중의 몸속에 기입됐고, 대중은 그것을 자기 욕망으로 착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방해를 받자 굉장히 격노하게 됐다는 거죠. 여기에는 물론 보수 언론들의 선정, 선동도 한몫했지만, 언론은 사실 대중들이 자발적으로 표출하는 분노에 슬쩍 편승했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이런 식으로 돌려놓는 거죠. 굉장히 우익적인 겁니다. 쉽게 말하면 그 분노 자체가 권력에 포섭되어 있는 거예요. 그런식으로 관리를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런 식으로 큰 문제에 분노하지 못하게 막아놓고 그 분노가 아주 사소한 대로 흐르게 만드는 거예요. 어느 여성 문인이 이렇게 물었더라고요. "왜 우리는 사소한 것에만 분노하는가?" 당연합니다. 그렇게 코딩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큰 문제에 분노하면 바로 탄압을 받습니다. 처벌을 받습니다. 그런 경험들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제대로 분노해야 할 대상에서 분노하지 못하고 쌓인 감정의 에너지가 엉뚱한 데로 흘러버리게 되죠. '왕따현상'도 그런 것 같아요. 아이들이 학교에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많은 경우에 그 원인을 자기들도 몰라요. 억압을 받는데 본인은 모를 때, 만만한 대상을 보고 거기에 표출해버린다는 거죠. 이건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아이들이 그렇게 한다는 건 어른들도 일상적으로 그렇게 한다는 거예요. 누구한테 배웠겠어요. 부모한테서 배웠지. 그런 문제입니다. 왕따, 이지메 같은 현상들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이유는 이 공적 분노의 에너지가 대상을 찾지 못해서예요. 왜? 그쪽으로는 비판, 비난이 허용이 안 되거든요. 그럴 때 쌓이고 쌓인 것은 탈출구를 찾아야 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인터넷을 떠돌아다니다가 만만한 상대를 보게 되면 거기에 폭발적으로 퍼붓는 현상이 벌어지는 거죠. 이것은 상당히 오랫동안 식민지배자들이 써먹었던 수법이기도 합니다.
 프란츠 파농이 '수평 폭력'이란 이야기를 했습니다. 식민지에서는 식민지배를 받는 사람들이 지배 권력에 대항하는 게 아니라 그 폭력을 자기동료들 내지 가족한테 퍼부어대요. 그걸 수평 폭력이라고 하거든요. 자기 억압의 근원을 향해 분노가 표출되는 게 아니라, 그게 허용이 안 되니까 옆으로 만만한 사람 혹은 자기보다 권력이 약한 사람한테 퍼부어대는 거죠. 우리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리고 셋째는 아예 분노 자체를 못하게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10년전쯤엔가 강준만씨가 대중을 향해서 이런 말을 했어요. " 왜 당신들은 분노할 줄 모르는가? 사회에서 이렇게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잇는데 왜 당신들은 침묵하는가." 아마도 이 사회에 팽배한 냉소주의를 지적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 당시에 냉소주의가 팽배했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요. 왜냐하면 소위 좌파나 진보 지식인들이 사회주의 몰락 이후에 몽땅 다 회의주의적인 분위기로 가버렸단 말이죠. 그러면서 사회에 대한 관심을 끊어버린 상태였어요. 아마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 같은데 그때는 강준만씨 혼자서 논객을 할때 아닙니까? 거의 1인 매체 만들고. 그러니까 굉장히 답답했던 모양이에요. 지금도 이런 냉소주의는 강할 거에요.
며칠 전에 어느 분이 쓴 칼럼 하나를 읽었는데 '주머니 속에 손 집어넣기' 신드롬이란 표현을 썼더군요. 그러니까 자기 손은 딱 집어넣고 평을 하는 거예요. "한나라당은 이래서 문제야, 민주당은 이래서 문제야, 그러는 진보신당은 별 수 있어? 다 도둑놈들이야." 아주 쿨하게 나가는 거죠. 이것도, 저것도, 아무것도 안 하는 태도입니다. 아마 권력이 볼 때는 이게 가장 바람직한 태도겠죠. 가장 착한 태도고요. 재밌는 건 이런 태도를 대단히 쿨한 자세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예요. 정치에 관심을 두고, 특정 당파의 편을 드는 행동을 낡은 것으로 간주하고 자기는 아무일도 안하고 평론만 하고. 그것이 대단히 쿨한 것인 양 착각하는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람은 자기의 그런 태도가 어떤 생체공학에서 만들어졌는지 의심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것도 만들어진 거거든요.
우리는 푸코의 말을 생각해야 합니다. "나의 사고방식, 나의 행동방식, 나의 정서구조, 이 모든 것들이 한편으로는 사회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그래서 우리는 주체이기 이전에 소셜 엔지니어링, 혹은 바이오 엔지니어링(생체공학)의 대상이라는 생각을 먼저 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주체가 될 수 있어요. 그런 인식 위에서, '내가 이제까지 남에 의해, 권력의 망에 의해서 만들어져 왔다면 이제부터는 나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 나를 스스로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라는 존재의 미학을 가져야 하는 것이죠. 조금 전에 말한 식의 쿨한 태도 있잖아요, 자칭 쿨한 태도. 제가 볼 때에는 멍청한 태도라는 생각이 들어요. 자기가 왜 그런지, 자기의 그런 태도는 어떤 경로를 통해 누구에 의해서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인가를 인식해야 한다는 거죠. 그 다음에 그것이 과연 온당한가 판단해야 하는데 그렇지는 않잖아요.

제가 볼때 이렇게 크게 세 가지가 대중의 분노가 권력이 아닌 엉뚱한 방향으로, 권력을 위해 표출되는 방식입니다. 첫 번째 방식은 상당히 파시스트적이에요. 두 번째 방식은 사소한 것으로 돌려서 분노가 권력을 향하는 게 아니라, 지배를 받는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싸우게 만드는 것이고요. 세번째는 아무것도 안 하게 만들면서 자기 스스로 쿨하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겁니다. 이처럼 세 가지 분노의 관리 방식이 있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분노할 수 있는 풍부한 감성을 갖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분노할 에너지가 없을 경우에 소위 'SO COOl'족들처럼 사회의 관찰자가 됩니다. 사실은 자기가 사회라는 장기판의 관찰자, 혹은 훈수 두는 사람이 아니라 장기판의 말인데도 그 점을 의식하지 못하는 거죠. 자신도 장기판에서 벌어지는 일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고 그것에 의해 고통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참여라는 건 굉장히 중요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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