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ust 20, 2016

시험, 고시 입시에 능했던 사람들..


딱히 경험이랄 것도 없이 젊은 나이에 골방에 몇년씩 쳐박혀 암기에 탁월했던 사람들 중 극히 일부의 사람들 중에는 소위 "고시"에 등극하여 20대에 검사 "영감님" 소리를 들으며 세상 무서운줄 모르고 40대가 되고 50대가 되어 이런저런 요직을 섬렵한 사람들이 있다.
근데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가지는 사적 욕망의 추구가 문제다. 사적 욕망의 추구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회나 인생, 삶에 대한 경험이 미천한 뛰어난 건 암기력 외에는 가진 것이 없는 "그들"은 고시통과라는 이름아래 평생을 호위호식하며 권력까지 누리며 공적 영역에서 사적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사적 욕망 충족의 방법이 다수의 사람들에게도 공감되는 용인되는 혹은 이해되는 방법이였으면 좋겠으나.. 불행히도 그런 류의 사람들은 타인이 격는 고통에 대한 이해나 공감능력은 별로인 것 같다. 암기라를 단순 '정보' 축적에는 뛰어났으나 문학이나 철학 등을 통해서는 딱히 습득한게 없는 모양이다. 허긴 그런건 시험에 잘 안나온다.
젊은 나이에 그 어렵다는 "고시"를 통과하였으니 유아독존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공적 영역에서의 사적 욕망의 추구에 애초에 부끄러뭄이나 미안함, 염치같은 것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들이 사적 영역에서 그 자신들의 사적 욕망을 추구했다면 누가 뭐라할 수 있겠는가.(사적 영역에서 욕망을 추구하더라도 비인간적 반인륜적이지 않아야 한다. 또한 혹시 모를 타인이 격을지도 모르는 고통에 대해 연민을 가져야 한다.)그러나 그들은 공적영역에서 사적욕망을 충족하려 했다. 그래서 도 문제다. 아래 글을 읽으면서 이런저랜 생각이 빠진다.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아서 옮겨와 본다.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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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 고시 입시에 능했던 어떤 사람들
http://www.kwangju.co.kr/read.php3?aid=1469458800582624067

대학 재학 중 사법고시 합격, 사법·행정 양시 패스, 고시 수석 등은 대다수 한국인이 부러워하는 일이었다. 합격자는 고향 네거리나 출신 학교 정문에 이름 석 자 드날리는 영예를 누린다. 그들의 노력과 의지에는 존경을, 능력에 대해서는 부러움을 가질 만하다. 그런데 ‘가문의 영광’이 국가나 사회의 영광이었을까? 최근 진경준, 우병우, 홍만표 등의 드러난 행태를 보면서 ‘시험 귀재’가 ‘사익 추구 귀재’가 되어 반사회적 행태를 저지르고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사실을 씁쓸하게 확인한다.

이게 어제 오늘의 일일까? 조선 말,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일 때 ‘시험 귀재’들은 ‘탐관오리’가 되어 사회를 타락시킨 장본인들이었고, 을사보호조약과 한일강제병합 당시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일제의 작위를 받아 호의호식하였다. 일제하에서 고등고시에 합격한 조선인 거의 전원은 동포들을 학대하는 일제의 하수인 역할을 했고, 군사정권 시절에는 고시 출신 대다수가 반민주 반인권 권력의 마름 역할을 했다.

물론 뛰어난 ‘능력’을 국가 경제 발전에 쏟았던 청렴하고 우수한 관료들도 많았고, 위의 압력에 맞서 옷을 벗고 인권 변론에 앞장선 법관들도 있었다. 그러나 권력과 대기업의 도구가 되기를 거부하고 공익을 위해 소신을 굽히지 않거나 약자인 국민의 편에 섰던 고위 관료나 법관은 거의 없었다.

이게 개인 탓일까, 제도 탓일까? 나는 제도 탓이라 본다. 고시 제도가 일종의 특권 지위를 보장해 주는 국가 공인 특허권 획득 경쟁이기 때문에 지망자들의 사적 욕망이 공공심을 압도하며, 결국 국가를 사익 추구의 장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단 한 번의 단답형 ‘정답이 있는’ 시험 자체에 있다. 현행 고시나 입시로는 사람의 잠재력, 탐구심, 그리고 공인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덕성을 평가할 수 없다. 엄격히 등수를 매겨서 승자와 패자를 냉혹하게 가르는 시험은 그 게임이 더 치열하거나 반복 횟수가 많을수록 참가자는 더욱 경쟁적 인간이 된다.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사람은 자신이 얻은 자격이 본인 능력으로 얻은 소유물이라 생각한 나머지 권력과 부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공조직을 사익의 수단으로 삼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특권 의식, 엘리트 의식을 갖는 그들은 과거에는 총칼을 쥐고 있는 자에게 복종하여 권력과 자리를 얻는 데 능숙했고, 오늘날에는 최고 부자들의 입 노릇을 하면서 부를 챙기는 ‘재주’에 능하다.

요즈음 세상의 지탄을 받는 ‘고위 공직자’들은 바로 고시 제도가 만들어 낸 ‘괴물’이자 어쩌면 이 제도의 희생자일지 모른다. 그 어려운 ‘시험’에서 1등의 성적을 거두었으니, 돈 버는 일에도 1등을 하려 하다가 1등 범죄자가 된 꼴이라고나 할까? 나향욱 교육부 기획관의 ‘국민 99% 개·돼지’ 발언도 결국은 “나는 행시 출신이니 너희들과 다른 세계에서 살 자격이 있다”는 고위 공직자들의 평소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조선 말의 과거시험 폐지론은 ‘시험 만능’인 오늘의 한국에도 유의미하다. 유형원은 과거라는 시험제도가 올바른 인재 선발의 방법이 아닐 뿐더러 교육·학문·문화와 정치를 타락시킨다고 보았고, 정약용도 과거시험이 “총명한 사람을 평균적 인간으로 만들고, 국가의 지적 군사 역량을 무너뜨린다”고 비판했다. 유길준도 “과문(科文)이란 것은 도를 해치는 함정이자 인재를 해치는 그물이며, 국가를 병들게 하는 근본이자 인민들을 학대하는 기구(機具)이니, 과문이 존재하면 백해(百害)가 있을 뿐”이라는 이유로 과거 폐지를 주장했다.

이 시대에도, 고시가 결국 편협한 전문가들의 특권 재생산 기구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제기되어 로스쿨 제도가 도입되었고, 국립외교원이 설립되었으며, 이제 행정고시만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로스쿨 역시 계급 재생산의 위험이 있고 선발 과정에서의 공정성이 논란이 되지만, 국가 공인 특권층 재생산 기제인 고시 제도로 다시 되돌아갈 수는 없다. ‘고시’가 국가나 사회에 미치는 해악을 잊어 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문제는 고시는 없어져도 한국식 ‘시험제도’는 남아 있다는 점이다. 기억력, 어학능력 그리고 ‘정답을 요구하는’ 논술 성적으로 부여한 자격증이 또 다시 특권으로 연결된다면 문제는 여전히 지속될 것이다. 그래서 시험제도를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 장차 객관식, 단답형, 정답 쓰는 시험제도를 폐지하고 사회적 평가 역량을 길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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