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ruary 14, 2026

김광규 -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김광규 -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위 시는... 내가 근자에 봤던 시 중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히는 '시'인듯하다. (아무래 봐도, 시인은 참으로 신묘한 사람들인 것같다. 어쩜 저리도 기똥차게 시를 쓰는 것인가...쩝.)

나이를 먹으면 본래(?) 그렇게 된다. 그냥저냥 살기 위해 사는 것뿐이고, 예전처럼 열정적으로 노래도 부르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냥 지난 시절을 회상하고, 추억하며 헛헛함을 삭히는 것이지...

어디 그뿐인가...? 시간이 가고, 늙어가며 우린 그저 하루하루 '늪'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것일 뿐이다.

사는 것이 의미와 희망을 갖는 것도 젊어 한때다. 젊은 시절이 지나면 그냥저냥 의무처럼 살아갈 뿐이다. 중년의, 노년의 견적서는 이미 확정되었으므로 그 견적서에 천지개벽할 큰 변수는 없다.

핑계로 들리겠지만... 타인에게 고통을 부과하지 않았고, 부조리와 모순, 부정과 부패 등을 온전히 회피 혹은 외면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꾸부정한 삶과 인생이 딱히 자랑스러운 건 없지만...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부끄러울 것도 없다. 우린 그저 주어진 생명을 충실히(?) 혹은 성실히(?) 살아내는 것뿐이지 않은가...?

* 한국에서 ‘시’가 죽는 이유: 제 멋대로 난도질을 함. + 정답이라고 우겨 강제로 주입 시킴 + 정해진(?) ‘정답’이 아니면 모두 오답으로 간주 함 + 기타 등등.

작품 감상

✓ 핵심 내용

-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대비함

- 서사적인 줄거리를 지니고 있음

- 일상어를 사용하여 현실적 생동감을 더해 줌

-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을 제시하여 현실감을 더해 줌

- 의문형 종결 어미를 사용하여 화자의 성찰적 태도를 나타냄

- 쉬운 일상어로 현실의 구체적 체험을 형상화하여 보편적 공감을 이끌어 냄

✓ 제목의 의미

- '옛사랑'은 4• 19 혁명 당시 친구들과 함께 나누었던 열띤 토론, 그 혁명의 열기를 말한다. '희미한 옛사 랑의 그림자'라는 제목에는 이미 지나가 버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젊은 날의 열정과 추억에 대한 그리 움과 아련한 슬픔이 담겨 있다.

✓ 화자의 설정

-'나'라는 개별적 화자가 아닌 '우리'라는 공동의 화자를 내세움으로써 화자를 포함한 독자까지 삶의 순수 성과 진정성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것에 대한 반성의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 화자의 정서 및 태도의 변화

- 이 작품의 화자는 젊은 시절 4· 19 혁명을 겪은 사람으로 중년이 되면서 변해 버린 '우리'의 모습에 대 해 노래하고 있다. 기성세대가 된 화자는 '처자식들의 안부'나 '월급', 물가' 같은 현실적 문제에 대해 가 볍게 얘기한다. 그러다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마른 잎을 흔들고 있는 플라타너스를 보고 부끄러움을 느끼 지만, 다시 늪'과 같은 일상으로 돌아가 현실에 체념하고 순응한 삶을 살아간다.

- 과거의 모습은 순수함과 열정으로 가득 찬 긍정적 삶

- 현재의 모습은 현실에 매몰되어 세속적으로 살고 있는 부정적 삶

✓ 시상 전개 방식

- 이 작품은 과거와 현재가 대비되며 서사적인 구조로 시상이 전개되고 있다. 전반부에서는 이상과 열정을 지녔던 젊은 시절의 '우리'의 모습이, 후반부에서는 현재 소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다시 모여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 '늪'의 상징적 의미

- 전반부가 '별똥별'로 끝나고 있다면 후반부는 '늪'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화자와 친구들은 플라타너스 가 로수를 보며 부끄러움을 느끼지만 곧 이를 외면하고 세속적 일상으로 빠져든다. 이러한 삶의 굴레를 '늪' 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 플라타너스 가로수들

- 화자와 친구들 : 시간이 지나 젊은 시절의 꿈과 열정을 잃고 현실에 안주하며 살아감

- 플라타너스 가로수들 : 시간의 흐름에도 변하지 않고 제자리에 서 있음

* 부끄러움과 죄책감 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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