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ch 9, 2024

"자유를 위한 한국인의 투쟁" - 프레데릭 매켄지 (4)

 당시 일본의 만행이나 야욕도 참~ 지랄같지만... 당시 조선의 상황이나 대처, 인식 등도 읽을수록 갑갑함이 더해지는 것 같다. 조선이 유교주의와 성리학 또는 왕권 국가 유지라는 보수적 태도에서 벗어나 좀 더 일찍, 빨리 근대화 민주화 등... 더 진보하고자 했다면... 하는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너무 크다. 하긴 2023년 현재에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말이다.

어쩌면 한국에 대한 안타까움과 아쉬움의 감정은 앞으로 영원히(?) 계속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지리적으로, 역사적으로 혹은 경제적 군사적으로 대한민국은 앞으로도 가야할 길이 멀기 때문이다. 그 과정속에서 또 얼마나 많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분명한 건... 지리적 역사적으로 볼 때 대한민국이 순탄하게 소위 말하는 통일국가 또는 선진국가가 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Korea's Fight for Freedom"

by Frederick Arthur Mckenzie

"자유를 위한 한국인의 투쟁" - 프레데릭 매켄지

I. OPENING THE OYSTER : 입을 열다

II. JAPAN MAKES A FALSE MOVE : 일본 잘못된 행동을 하다

III. THE MURDER OF THE QUEEN : 왕비의 살인

IV. THE INDEPENDENCE CLUB : 독립 클럽

V. THE NEW ERA : 새로운 시대

VI. THE RULE OF PRINCE ITO : 이토 공자의 통치

VII. THE ABDICATION OF YI HYEUNG : 이형 퇴위

VIII. A JOURNEY TO THE "RIGHTEOUS ARMY" : 의로운 군대의 여정

IX. WITH THE REBELS : 반란과 함께

X. THE LAST DAYS OF THE KOREAN EMPIRE : 대한 제국의 마지막 날

XI. "I WILL WHIP YOU WITH SCORPIONS" : 전갈로 채찍질을 하다

XII. THE MISSIONARIES : 선교사들

XIII. TORTURE A LA MODE : 고문하다

XIV. THE INDEPENDENCE MOVEMENT : 독립운동

XV. THE PEOPLE SPEAK? THE TYRANTS ANSWER : 사람들이 말하고 폭군이 대답하다

XVI. THE REIGN OF TERROR IN PYENG-YANG : 평양의 공포정치

XVII. GIRL MARTYRS FOR LIBERTY : 자유를 위한 소녀 순교자

XVIII. WORLD REACTIONS : 세계의 반응

XIX. WHAT CAN WE DO? : 무엇을 할 수 있는가?

III THE MURDER OF THE QUEEN

왕비의 살인

"We are not ready to fight China yet," said the Japanese Foreign Minister to the impetuous young Korean. It was ten years later before Japan was ready, ten years of steady preparation, and during that time the real focus of the Far Eastern drama was not Tokyo nor Peking, but Seoul. Here the Chinese and Japanese outposts were in contact. Here Japan when she was ready created her cause of war.

“우리는 아직 중국과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일본 외무상이 성급한 젊은 한국인에게 말했다. 일본이 준비되기까지 10년이 걸렸다. 일본이 10년간 꾸준한 준비하는 동안 극동 드라마의 진정한 초점은 도쿄도 북경도 아닌 서울이었다. 중국과 일본의 전초기지가 접촉했다/연락을 취했다/충돌했다. 일본은 준비가 되었을 때 전쟁의 빌미를 만들었다.

impetuous 성급한/충동적인

outpost 전초기지/벽지의 소도시/외딴곳에 있는 건물들

China despised Japan, and did not think it necessary to make any real preparations to meet her. The great majority of European experts and of European and American residents in the Far East were convinced that if it came to an actual contest, Japan would stand no chance. She might score some initial victories, but in the end the greater weight, numbers and staying power of her monster opponent must overwhelm her.

중국은 일본을 경멸했고 일본을 대적하기 위해 실질적인 준비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대다수의 유럽 전문가들과 극동 지역의 유럽 및 미국 거주자들은 실제로 두 나라 사이에 경쟁이 붙는다면 일본은 승산이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일본은 초기에 약간의 승리를 거둘 수도 있겠지만 결국에는 상대-즉 거대한 중국의 더 큰 무게, 숫자 및 지속력이 일본을 압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despise 경멸하다

The development of Korea proceeded slowly. It seemed as though there were some powerful force behind all the efforts of more enlightened Koreans to prevent effective reforms from being carried out The Japanese were, as was natural the most numerous settlers in the land, and their conduct did not win them the popular affection. Takezoi's disastrous venture inflicted for a time a heavy blow on Japanese prestige. The Japanese dead lay unburied in the streets for the dogs to eat. China was momentarily supreme. "The whole mass of the people are violently proChinese in their sentiments," the American representative stated in a private despatch to his Government, "and so violently anti-Japanese that it is impossible to obtain other than a volume of execrations and vituperations against them when questioned," A semi-official Japanese statement that their Minister and his troops had gone to the palace at the King's request, to defend him, made the matter rather worse.

한국의 발전은 느리게 진행되었다. 효과적인 개혁이 수행되는 것을 막으려는 보다 개화된 한국인들의 모든 노력 뒤에는 어떤 강력한 힘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당연히 일본인은 이 땅에서 가장 많은 정착민이었으며, 그들의 행위는 대중의 사랑을 얻지 못했다. 다케조이의 비참한 모험은 한동안 일본의 명성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일본인의 시체는 개들이 먹을 수 있도록 거리에 묻히지 않은 채 누워 있었다. 중국은 잠시 동안 최고였다(대중들로부터 호의적인 국가로 인식되었다). 미국 대표는 자신의 정부에 보낸 비공개 서신에서 "대중 전체가 감정적으로 폭력적으로 친중적이며 너무나 폭력적으로 반일적이어서 그들(일본인들)에 대해 물었을 때 그들에 대한 엄청난 비난과 비난 외에는 얻을 수 없는 것이 있다"라고 전했다. 일본의 장관과 그의 군대가 왕의 요청에 따라 그를 변호하기 위해 궁으로 갔던 것이라 반공식적인 일본의 성명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inflicte 괴로움 등을 가하다/안기다

execration 증오/몹시 싫어함/저주

vituperation 혹평

The affair would have been more quickly forgotten but for the overbearing attitude of Japanese settlers towards the Korean people, and of Japanese Ministers towards the Korean Government. Officially they advanced claims so unjust that they aroused the protest of other foreigners. The attitude of the Japanese settlers was summed up by Lord (then the Hon. G.N.) Curzon, the famous British statesman, after a visit in the early nineties. "The race hatred between Koreans and Japanese," he wrote, "is the most striking phenomenon in contemporary Chosen. Civil and obliging in their own country, the Japanese develop in Korea a faculty for bullying and bluster that is the result partly of nation vanity, partly of memories of the past. The lower orders ill-treat the Koreans on every possible opportunity, and are cordially detested by them in return."[1]

이 사건은 한국 국민에 대한 일본인들의 위압적인 태도와 한국 정부에 대한 일본 장관들의 위압적인 태도가 없었다면 더 빨리 잊혀졌을 것이다. 공식적으로 그들은 너무 부당한 주장을 제기하여 다른 외국인들의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일본 정착민들의 태도는 90년대 초 영국을 방문한 유명한 영국 정치가 커즌 경(당시 Hon. G.N.)에 의해 요약되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의 인종적 증오는 현대 조선인의 가장 눈에 띄는 현상이다. 자국에서 예의 바르고 고분고분한 일본인은 부분적으로는 국가 허영심,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과거 기억의 결과인 따돌림과 고함을 지르는 능력을 한국에서 발휘했다. 일본인 하급 계층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인을 학대하고 그 대가로 한국인들은 진심으로 그들을 미워하게 되었다."

vanity 자만심/허영심

bluster 고함치다/엄포를 놓다

cordially 진심으로/몹시/지독히

detest 몹시 싫어하다/혐오하다

[Footnote 1: "Problems of the Far East," London, 1894.] The old Regent returned from China in 1885, to find his power largely gone, at least so far as the Court was concerned. But he still had friends and adherents scattered all over the country. Furious with the Chinese for his arrest and imprisonment, he threw himself into the arms of the Japanese. They found in him a very useful instrument.

[각주 1: "극동의 문제", 런던, 1894.]

1885년에 중국에서 돌아온 옛 섭정은 적어도 조정에 관한 한 그의 권력이 거의 사라졌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친구와 지지자들은 여전히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자신의 체포와 투옥에 대해 중국인에게 분노한 그는 일본인의 품에 몸을 맡겼다. 그들(일본인들)은 그(옛 섭정)가 매우 유용한 도구임을 알게 되었다.

Korea has for centuries been a land of secret societies. A new society now sprang up, and spread with amazing rapidity, the Tong-haks. It was anti-foreign and anti-Christian, and Europeans were at first inclined to regard it in the same light as Europeans in China later on regarded the Boxers. But looking back at it to-day it is impossible to deny that there was much honest patriotism behind the movement. It was not unnatural that a new departure, such as the introduction of Europeans and European civilization should arouse some ferment. In a sense, it would not have been healthy if it had not done so. The people who would accept a vital revolution in their life and ways without critical examination would not be worth much.

한국은 수 세기 동안 (알려지지 않은) 비밀의 나라였다. 동학이라는 새로운 사회가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생겨나 확산되었다. 그것은 반 외 국적이고 반기독교적이었는데, 유럽인들은 처음에 그것을 중국의 유럽인들이 나중에 의화단을 간주했던 것과 같은 관점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돌이켜보면 그 운동 뒤에는 정직한 애국심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유럽인과 유럽 문명의 유입과 같은 새로운 출발이 어떤 동요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건강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비판적인 검토 없이 자신의 삶과 방식에서 영향을 끼치는 획기적 혁명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그다지 가치가 없는(사려 깊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Few of the Tong-haks had any idea that their movement was being organized under Japanese influences. It did not suit Japan that Korea should develop independently and too rapidly. Disturbances would help to keep her back.

동학파 중에는 자신들의 운동이 일본의 영향을 받아 조직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한국이 자주적으로, 너무 빨리 발전하는 것은 일본에게 적합하지 않았다. (한국의 변화를) 방해하는 것이 일본에게 도움이 될 것이었다.

When the moment was ripe, Japan set her puppets to work. The Tong-haks were suddenly found to be possessed of arms, and some of their units were trained and showed remarkable military efficiency. Their avowed purpose was to drive all foreigners, including the Japanese, out of the country; but this was mere camouflage. The real purpose was to provoke China to send troops to Korea, and so give Japan an excuse for war.

적당한 때가 무르익었을 때 일본은 그들의 꼭두각시를 움직였다. 동학교도들이 갑자기 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사실이 밝혀졌고, 일부 부대는 훈련을 받아 뛰어난 군사력을 보여주었다. 공언된 그들의 목적은 일본인을 포함한 모든 외국인을 국외로 몰아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위장에 불과했다. 진짜 목적은 중국을 자극해 한국에 군대를 파견하고, 일본에게 전쟁의 구실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실패로 끝난 동학혁명은 훗날... 청일전쟁의 시발점이 된다.

The Japanese had secured an agreement from China in 1885 that both countries should withdraw their troops from Korea and should send no more there without informing and giving notice to the other. When the Tong-haks, thirty thousand in number, came within a hundred miles of Seoul, and actually defeated a small Korean force led by Chinese, Yuan Shih-kai saw that something must be done. If the rebels were allowed to reach and capture the capital, Japan would have an excuse for intervention. He induced the King to ask for Chinese troops to come and put down the uprising; and as required by the regulations, due notice of their coming was sent to Japan.

일본은 1885년 중국으로부터 양국이 한국에서 군대를 철수해야 하며 상대방에게 알리고 통보하지 않고 한국에 더 이상 병력을 보내서는 안 된다는 합의를 얻었다. 3만 명의 동학군이 서울에서 100마일 이내로 접근하여 중국이 이끄는 소규모 한국군을 실제로 격파했을 때 위안스카이는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반군이 수도에 도달하여 점령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일본은 개입할 구실을 갖게 될 것이었다. 그는 왕에게 중국군이 와서 봉기를 진압할 것을 요청하도록 유도했다. 그리고 규정에 따라 중국군이 왔다는 통지가 일본에 전달되었다.

This was what Japan wanted. She poured troops over the channel until there were 10,000 in the capital Then she showed her hand. The Japanese Minister, Mr. Otori, brusquely demanded of the King that he should renounce Chinese suzerainty. The Koreans tried evasion. The Japanese pressed their point, and further demanded wholesale concessions, railway rights and a monopoly of gold mining in Korea. A few days later, confident that Europe would not intervene, they commanded the King to accept their demand unconditionally, and to give the Chinese troops three days' notice to withdraw from the land. The King refused to do anything while the Japanese troops menaced his capital.

일본이 원한 것은 이것이었다. 그녀는 수도에 10,000명이 될 때까지 수로 위로 군대를 쏟아부었다. 그런 다음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일본 대신 오토리 씨는 국왕에게 중국의 종주권을 포기해야 한다고 요구했지만, 한국은 그런 일본의 요구를 적당히 얼버무리며 회피했다. 일본은 자신들의 주장을 강조하고 나아가 한국에게 도매권의 양보, 철도 권리 및 금광 독점권을 요구했다. 며칠 후, 일본은 유럽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왕에게 자신들의 요구를 무조건 받아들이고, 중국군에게 3일 안에 조선 땅에서 철수할 것을 통지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일본군이 수도를 위협하는 동안 왕은 아무것도 하는 것으로 일본군의 요구를 사실상 거부했다.

renounce (직함·직책 등을 공식적으로) 포기[단념]하다/포기를 선언하다/버리다[그만두다]/의절을 선언하다

brusquely/brusque 퉁명스럽게/무뚝뚝한/퉁명스러운

suzerainty 종주권(宗主權)/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대해 간섭하고 지시할 권리를 부여하는 특수 관계

evasion 회피/모면/얼버무리기

menace 위협적인 존재/위협/위협하다

The declaration of war between Japan and China followed. The first incident was the blowing up by the Japanese of a Chinese transport carrying 1,200 men to Korea. The main naval battle was in the Yalu, between Korea and Manchuria, and the main land fight, in which the Chinese Army was destroyed, in Pyeng-yang, the main Korean city to the north. The war began on July 25, 1894; the Treaty of Peace, which made Japan the supreme power in the Extreme East, was signed at Shimonoseki on April 17, 1895.

일본과 중국 사이에 선전포고가 이어졌다. 첫 번째 사건은 1,200명의 병력을 한국으로 수송하던 중국 수송선을 일본군이 폭파한 사건이다. 주요 해전은 조선과 만주 사이의 압록강에서 있었고, 중국군이 괴멸된 주요 육상전은 북쪽에 있는 조선의 주요 도시인 평양에서 있었다. 전쟁은 1894년 7월 25일에 시작되었고,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에서 일본을 극동 지역의 최고 권력으로 만든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Before fighting actually began, the Japanese took possession of Seoul, and seized the palace on some trumpery excuse that Korean soldiers had fired on them and they had therefore been obliged to enter and guard the royal apartments. They wanted to make their old friend and ally the ex-Regent, the actual ruler, as he had been in the King's minority but he did not care to take responsibility. Japanese soldiers turned the King out of his best rooms and occupied them themselves. Any hole was good enough for the King. Finally they compelled the King to yield and follow their directions. A new treaty was drawn up and signed. It provided

실제로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일본군은 서울을 점령했고, 한국군이 그들에게 총격을 가했기 때문에 왕실에 들어가서 경비해야 한다는 비열한 구실로 궁궐을 점령했다. 일본은 오랜 친구이자 동맹이자 왕의 소수에 속했던 전 섭정을 실제 통치자로 만들고 싶었지만, 그는 어떤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았다. 일본군은 왕이 머물던 가장 좋은 방에서 쫓아내고 그들 스스로 그 방을 차지했다. 어떤 구멍(하찮은 곳)이라도 왕에게는 충분했다. 끝내 일본은 왕에게 양보할 것과 그들의 지시를 따르도록 강요했다. 새로운 조약이 작성되어 서명되었고, 다음과 같은 조항들이 있었다.

trumpery 하찮은 건물

trumpery excuse 비열한 구실/하찮은 구실

1. That the independence of Korea was declared, confirmed, and established, and in keeping with it the Chinese troops were to be driven out of the country.

1. 한국의 독립이 선언, 확인, 수립되었으며, 이에 따라 중국군이 한국에서 추방될 것임.

2. That while war against China was being carried on by Japan, Korea was to facilitate the movements and to help in the food supplies of the Japanese troops in every possible way.

2. 일본이 중국과의 전쟁을 벌이는 동안 한국은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일본군의 이동을 촉진하고 식량 공급을 지원해야 함.

3. That this treaty should only last until the conclusion of peace with China.

3. 이 조약은 중국과의 평화가 체결될 때까지 지속되어야 함.

1번 조항은 얼핏 보면 좋은 것 같지만... 사실 일본의 속내는 한국을 중국과의 관계를 단절시켜 '독립된 국가'로 만들어 좀 더 쉽게 한국을 점령하고자 하는 속셈이었다.

Japan at once created an assembly, in the name of the King, for the "discussion of everything, great and small, that happened within the realm." This assembly at first met daily, and afterwards at longer intervals. There were soon no less than fifty Japanese advisers at work in Seoul. They were men of little experience and less responsibility, and they apparently thought that they were going to transform the land between the rising and setting of the sun. They produced endless ordinances, and scarce a day went by save that a number of new regulations were issued, some trivial, some striking at the oldest and most cherished institutions in the country. The Government was changed from an absolute monarchy to one where the King governed only by the advice of his Ministers. The power of direct address to the throne was denied to any one under the rank of Governor. One ordinance created a constitution, and the next dealt with the status of the ladies of the royal seraglio. At one hour a proclamation went forth that all men were to cut their hair, and the wearied runners on their return were again despatched hot haste with an edict altering the official language. Nothing was too small, nothing too great, and nothing too contradictory for these constitution-mongers. Their doings were the laugh and the amazement of every foreigner in the place.

일본은 즉시 국왕의 이름으로 "국내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모든 일을 논의" 하기 위한 회의/의회를 창설했다. 이 모임은 처음에는 매일 열렸지만 이후에는 더 긴 간격으로 열렸다. 곧 서울에는 50명이 넘는 일본인 고문이 활동하게 되었다. 그들은 경험이 거의 없고 책임감도 적은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이 해가 뜨고 지는 사이(아주 짧은 시간 안에)에 땅(한국)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끝없는 조례를 만들었고, 몇 가지 사소한 규정과 이 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소중히 여겨지는 기관에 충격을 주는 몇몇 새로운 규정이 하루 만에 발표되었다.(즉 하루 만에 여러 법령들이 만들어졌다는 의미) 정부는 절대군주제에서 왕이 장관들의 조언에 의해서만 통치하는 정부로 바뀌었다. 총독 이하의 사람에게는 왕좌에 직접 연설하는 권한이 거부되었다. 하나의 조례는 헌법을 만들었고, 다음 조례는 왕실 세랄리오 여성들(후궁들)의 지위를 다루었다. 위 법령이 만들어지고 한 시간 만에 모든 남자는 머리카락을 자르라는 포고령이 내려졌고, (그렇게 신속하게 만들어지는 포고령을 전달하느라) 지친 주자들/전달자들은 공식 언어를 변경하는 칙령을 전달하자마자 다시 다른 법령을 전달하느라 서둘러 급히 다시 파견되었다. 헌법을 중시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법령들이) 작은 것도, 큰 것도, 너무 모순적인 것도 없었다. 그들의 행동은 그 곳에 있는 모든 외국인들의 웃음과 놀라움이 되었다.

ordinance 조례/법령

scarce 부족한/드문/겨우/간신히/거의~않다

monarchy 군주제

seraglio 후궁/이슬람 궁전

constitution-mongers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상인/장수

Acting on the Japanese love of order and of defined rank, exact titles of honour were provided for the wives of officials. These were divided into nine grades: "Pure and Reverend Lady," "Pure Lady," "Chaste Lady," "Chaste Dame," "Worthy Dame," "Courteous Dame," "Just Dame," "Peaceful Dame," and "Upright Dame." At the same time the King's concubines were equally divided, but here eight divisions were sufficient: "Mistress," "Noble Lady," "Resplendent Exemplar," "Chaste Exemplar," "Resplendent Demeanour," "Chaste Demeanour," "Resplendent Beauty," and "Chaste Beauty." The Japanese advisers instituted a number of sumptuary laws that stirred the country to its depths, relating to the length of pipes, style of dress, and the attiring of the hair of the people. Pipes were to be short, in place of the long bamboo churchwarden beloved by the Koreans. Sleeves were to be clipped. The topknot, worn by all Korean men, was at once to be cut off. Soldiers at the city gates proceeded to enforce this last regulation rigorousl.

질서와 정의된 지위를 좋아하는 일본인의 애정에 따라 관리의 아내에게 정확한 명예 칭호가 붙여졌다. 이들은 9개의 등급으로 나뉘었는데, "순수하고 존경하는 귀부인", "순수한 귀부인", "순결한 귀부인", "순결한 귀부인", "가치 있는 귀부인", "예의 바른 귀부인", "그냥 귀부인", "평화로운 귀부인", "정직한 귀부인." 동시에 왕의 후궁은 균등하게 나뉘었지만 여기서는 여덟 가지 구분으로 충분했다: "여주인", "고귀한 귀부인", "찬란한 모범자", "순결한 모범자", "찬란한 품행", "순결한 품행", "찬란한 미인" , "및 "순결한 아름다움". 일본 고문들은 파이프의 길이, 의복 스타일, 사람들의 머리 장식과 관련하여 나라를 심오하게 뒤흔드는 수많은 사치법을 제정했다. 한국인들이 사랑하는 긴 대나무 파이프는 짧게 만들어졌다. 소매는 잘라야 했다. 모든 한국 남자들이 다 쓰던 상투가 한꺼번에 끊어야 했다. 특히 성문에 있는 군인들에게는 이 마지막 규정을 엄격하게 시행하기 시작했다.

concubine 과거의 첩

reverend 숭배

chaste 순결한/순수한/소박한/꾸밈없는

dame 영국에서 여성에게 붙이는 직함/여자

resplendent 눈부시게 빛나는

exemplar 모범/전형

demeanour 처신/태도

sumptuary 사치 규제의/윤리규제의/비용 절감의

churchwarden 긴 대나무 담뱃대

topknot 상투

Japanese troops remained in the palace for a month, and the King was badly treated during that time. It did not suit the purpose of the Japanese Government just then to destroy the old Korean form of administration. It was doubtful how far the European Powers would permit Japan to extend her territory, and so the Japanese decided to allow Korea still to retain a nominal independence. The King and his Ministers implored Mr. Otori to withdraw his soldiers from the royal presence. Mr. Otori agreed to do so, at a price, and his price was the royal consent to a number of concessions that would give Japan almost a monopoly of industry in Korea. The Japanese guard marched out of the palace on August 25th, and was replaced by Korean soldiers armed with sticks. Later on the Korean soldiers were permitted to carry muskets, but were not served with any ammunition. Japanese troops still retained possession of the palace gates and adjoining buildings.

일본군은 한 달 동안 궁궐에 머물렀고, 그 기간 동안 왕은 심한 대우를 받았다. 당시 일본 정부가 한국의 낡은 행정 형태를 파괴하려는 목적은 적합하지 않았다. 유럽 ​​열강이 일본의 영토 확장을 어디까지 허용할지 의문이었기 때문에 일본은 한국이 명목상 독립을 유지하도록 허용하기로 결정했다. 국왕과 대신들은 오토리 씨에게 그의 병사들을 왕실에서 철수시킬 것을 간청했다. 오토리 씨는 그에 대한 대가를 전제로 하고 병사를 철수하기로 했고, 그 대가는 일본이 한국에서 산업을 거의 독점할 수 있도록 하는 수많은 양보에 대한 것이였으며, 왕은 이에 동의했다. 8월 25일 일본 수비대가 궁궐 밖으로 철수했고, 그 자리에는 몽둥이로 무장한 한국군이 투입되었다. 나중에 한국군은 머스켓 총 휴대가 허용되었지만 탄약은 지급되지 않았다. 일본군은 여전히 ​​궁전 문과 인접 건물을 소유하고 있었다.

nominal 명목상/이름뿐인

implore 애원하다/간청하다

musket 머스켓 총(소총의 일종)

Another movement took place at this time as the result of Japanese supremacy. The Min family--the family of the Queen--was driven from power and the Mins, who a few months before held all the important offices in the kingdom, were wiped out of public life, so much so that there was not a single Min in one of the new departments of state.

이때 일제 패권의 결과로 또 다른 움직임이 일어났다. 여왕의 가문인 민씨 가문은 권력에서 쫓겨났고, 몇 달 전만 해도 왕국의 모든 중요한 직책을 맡았던 민씨 가문은 새로운 정부 조직의 공적 생활에서 모두 쫓겨나 단 한 명도 남지 않았다.

supremacy 패권/우위

Victory did not improve the attitude of the Japanese to the Koreans. While the war was on the Japanese soldiers had shown very strict discipline, save on certain unusual occasions. Now, however, they walked as conquerors. The Japanese Government presented further demands to the King that would have meant the entire trade of Korea being monopolized by their countrymen. These demands went so far that the foreign representatives protested.

일본의 이러한 승리는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태도를 개선하지 못했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군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매우 엄격한 규율을 보였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정복자로서 활보했다. 일본 정부는 한국의 무역 전체가 자국 국민에 의해 독점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추가 요구를 국왕에게 제시했다. 이러한 일본의 요구는 다른 외국 대표들이 항의할 정도였다.

The new Japanese Minister, Count Inouye, protested publicly and privately against the violent ways and rascalities of the new Japanese immigrants pouring into Korea. He denounced their lack of cooeperation, arrogance and extravagance. "If the Japanese continue in their arrogance and rudeness," he declared, "all respect and love due to them will be lost and there will remain hatred and enmity against them."

신임 일본 공사 이노우에 백작은 한국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일본 이민자들의 폭력적인 방식과 만행에 대해 공개적으로 그리고 사적으로 항의했다. 그는 그들의 협력 부족, 오만함, 사치를 비난했다. 그는 "일본인들이 계속 오만하고 무례하게 행동한다면 그들에 대한 모든 존경과 사랑은 사라질 것이며 그들에 대한 증오와 적대감은 남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rascality 하층민/악당 짓/파렴치/비열/만행

enmity 원한/증오/적대감

Several of the participants in the _emeute_ of 1884 were brought back by the Japanese and Pak Yung-hyo became Home Minister. He was very different from the rash youth who had tried to promote reform by murder eleven years before. He had a moderate, sensible program, the reform and modernization of the army, the limitation of the powers of the monarchy and the promotion of education on Western lines. "What our people need," he declared, "is education and Christianization." Unfortunately he fell under suspicion. The Queen thought that his attempt to limit the power of the King was a plot against the throne. He received warning that his arrest had been ordered, and had to flee the country.

1884년 폭동(emeute=riot)에 참가한 사람들 중 몇몇이 일제에 의해 송환되었고 박영효가 내무장관이 되었다. 그는 11년 전 살인을 통해 개혁을 추진했던 경솔한 청년과는 사뭇 달랐다. 그는 온건하고 합리적인 계획, 군대의 개혁과 현대화, 군주제의 권력 제한, 서구 교육의 장려했다. 그는 “우리 국민에게 필요한 것은 교육과 기독교화”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의심을 받았다. 여왕은 왕의 권력을 제한하려는 그의 시도가 왕좌에 대한 음모라고 생각했다. 그는 체포 명령이 내려졌다는 경고를 받고 국외로 도피해야 했다.

▶아마 이때 왕비가 박영효의 근대화 노력을 역모라고 생각한 이유는... 왕비 역시 (고종과 마찬가지로) 전대성(즉 성리학적 왕권국가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해는 하지만... 안타깝다 하겠다.

Count Inouye ranks with Prince Ito as the two best Japanese administrators sent to Korea. He was followed, in September, 1895, by Viscount General Miura, an old soldier, a Buddhist of the Zen school and an extreme ascetic.

이노우에 백작은 이토 왕자와 함께 한국에 파견된 일본 최고의 행정가 두 명으로 평가된다. 1895년 9월 그의 뒤를 이어 노병이자 선종(불교의 한 종파-선종, 선학원)의 불교도이자 극도의 수행자인 미우라 자작이 뒤를 이었다.

ascetic 금욕적인

zen school 선학원

The Queen continued to exercise her remarkable influence over the King, who took her advice in everything. She was the real ruler of the country. What if her family was, for a time, in disgrace? She quietly worked and brought them back in office again. Time after time she checked both the Japanese Minister and the Regent.

여왕은 모든 일에 있어서 그녀의 조언을 받아들이는 왕에게 놀라운 영향력을 계속 행사했다. 그녀는 이 나라의 진정한/실질적인 통치자였다. 그녀의 가족이 한동안 치욕을 당했다면 어떻게 될까? 그녀는 조용히 일했고 그들을 다시 사무실로 데려왔다. 그녀는 자주 일본 공사와 섭정 모두를 확인했다/감시했다.

The Japanese Secretary of Legation, Fukashi Sugimura, had long since lost patience with the Queen and urged on Miura that the best thing was to get rid of her. Why should one woman be allowed to stand between them and their purpose? Every day she was interfering more and more in the affairs of state. She was proposing to disband a force of troops that had been created, the Kunrentai, and placed under Japanese officers. It was reported that she was contemplating a scheme for usurping all political power by degrading some and killing other Cabinet Ministers favourable to Japan. Miura agreed. She was ungrateful. Disorder and confusion would be introduced into the new Japanese organization for governing the country. She must be stopped.

일본 공사관 스기무라 후카시(Fukashi Sugimura)는 여왕에 대한 인내심을 잃은 지 오래였으며 미우라에게 최선은 여왕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촉구했다. 왜 한 여성이 그들과 그들의 목적 사이에 서도록 했을까? 그녀는 매일 국정에 점점 더 간섭하고 있었다. 그녀는 창설된 군대인 쿤렌타이(Kunrentai)를 해체하고 일본 장교 아래 배치할 것을 제안하고 있었다. 일부는 지위를 빼앗아 강등시키고, 일본에 유리한 다른 각료들은 살해하여 정치권력을 모두 빼앗으려는 계략을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우라도 동의했다. 그녀는 배은망덕했다. 국가를 다스리는데 있어 일본의 새로운 통치 조직에는 무질서와 혼란이 닥칠 것이다. 그녀를 저지해야 했다.

disband 해산하다.해체하다

contemplating 고려하다/생각하다/심사숙고하다

usurping 왕조 권자를 빼앗다/찬탈하다

While Miura was thinking in this fashion the Regent came to see him. He proposed to break into the palace, seize the King and assume real power. As a result of their conversation, a conference was held between the Japanese Minister and his two leading officials, Sugimura and Okamoto. "The decision arrived at on that occasion," states the report of the Japanese Court of Preliminary Enquiries, "was that assistance should be rendered to the Tai Won Kun's (Regent's) entry into the palace by making use of the Kunrentai, who, being hated by the Court, felt themselves in danger, and of the young men who deeply lamented the course of events, and also by causing the Japanese troops stationed in Seoul to offer support to the enterprise. It was further resolved that this opportunity should be availed of for taking the life of the Queen, who exercised overwhelming influence in the Court."[1]

미우라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섭정이 그를 찾아왔다. 그는 궁전에 침입하여 왕을 붙잡고 진정한 권력을 차지할 것을 제안했다. 대화 결과, 일본 대신과 그의 두 주요 관료인 스기무라와 오카모토 사이에 회담이 열렸다. 일본 예심 법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그 때 내려진 결정은 쿤렌타이를 활용하여 대원군(섭정)의 궁궐 입성을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법원의 미움을 받아 위험을 느낀 청년들은 사태의 경과를 깊이 한탄하고, 서울에 주둔한 일본군이 기업에 지원을 하게 함으로써 이 기회를 궁궐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여왕의 목숨을 빼앗는 데 활용해야 한다고 믿었다.

render 만들다/주다/제공하다/제시하다

lamented 몹시 애석한/아쉬운

[Footnote 1: Japanese official report.] The whole thing was to be done according to system. The Regent was made to bind himself down to the Japanese. A series of pledges was drawn up by Sugimura, and handed to the Regent, saying that this was what Miura expected of him. He, his son and his grandson "gladly assented" to the conditions and he wrote a letter guaranteeing his good faith. The Japanese Minister then resolved to carry out the plan, _i.e._, the attack on the palace and the murder of the Queen, by the middle of the month. A statement by the Korean War Minister that the disbandment of the Kunrentai troops was approaching caused them to hurry their plans. "It was now evident that the moment had arrived, and that no more delay should be made. Miura Goro and Fukashi Sugimura consequently determined to carry out the plot on the night of that very day."[1]

[각주 1: 일본 공식 보고서.] 모든 일은 시스템에 따라 이루어졌다. 섭정은 자신을 일본군 아래에 종속되게 되었다. 스기무라는 일련의 서약서를 작성하여 섭정에게 전달하면서 이것이 미우라가 그에게 기대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와 그의 아들, 손자는 조건에 "기꺼이 동의"했고 그의 선의를 보장하는 편지를 썼다. 그러자 일본 대신은 궁궐 공격과 왕비 살해 계획을 이달 중순까지 실행하기로 결심했다. 쿤렌타이(Kunrentai) 군대의 해체가 다가오고 있다는 한국 국방장관의 성명으로 그들은 계획을 더 서두르게되었다. "이제 그 순간이 도래했고 더 이상 지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결과적으로 미우라 고로와 스기무라 후카시는 바로 그날 밤에 음모를 실행하기로 결정했다."[1]

The Legation drew up a detailed program of what was to happen, and orders were issued to various people. Official directions were given to the Commander of the Japanese battalion in Seoul Miura summoned some of the Japanese and asked them to collect their friends and to act as the Regent's body-guard when he entered the palace. "Miura told them that on the success of the enterprise depended the eradication of the evils that had done so much mischief in the Kingdom for the past twenty years, and instigated them to despatch the Queen when they entered the palace."[2] The head of the Japanese police force was ordered to help; and policemen off duty were to put on civilian dress, provide themselves with swords and proceed to the rendezvous. Minor men, "at the instigation of Miura, decided to murder the Queen and took steps for collecting accomplices."[3]

공사관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상세한 계획을 작성했고 다양한 사람들에게 명령이 내려졌다. 서울주둔 일본 대대장에게 공식적인 지시가 내려졌고, 미우라는 일본군 몇 명을 불러서 친구들을 모아 섭정이 궁궐에 들어갈 때 경호원 역할을 해줄 것을 요청했다. "미우라는 그들에게 과업의 성공 여부는 지난 20년 동안 왕국에 많은 해악을 끼친 악을 근절하는 데 달려 있다고 말했고, 그들이 궁전에 들어갈 때 여왕을 파견하도록 선동했다."[2] 일본 경찰청장은 도움을 주라는 명령을 받았다. 근무하지 않는 경찰은 민간 복장을 입고 칼을 들고 집결 장소로 이동해야 했다. 미우라의 부추김을 받은 소수 남성들은 여왕을 살해하기로 결정하고 공범자를 모았다.

battalion 부대/대대

eradication 근절/박멸/소거

instigated 실시하다/착수하다/부추기다/선동하다

rendezvous 약속/만남/만나다

accomplice 공범

[Footnote 1: Japanese official report.]

[Footnote 2: Ibid.]

[Footnote 3: Ibid.] The party of Japanese met at the rendezvous, to escort the Regent's palanquin. At the point of departure Okamoto (one of the Japanese Minister's two right-hand men) "assembled the whole party outside the gate of the Prine's (Regent's) residence, declaring that on entering the palace the 'fox' should be dealt with according as exigency might require, the obvious purpose of this declaration being to instigate his followers to murder Her Majesty the Queen."[4] The party proceeding towards Seoul met the Kunrentai troops outside the West Gate and then advanced more rapidly to the palace.

[각주 3: 동일] 일본군은 섭정의 가마를 호위하기 위해 집결지에 모였다. 출발할 때 오카모토(일본 장관의 두 오른팔 중 한 명)는 "군주(섭정)의 관저 문 밖에 일행 전체를 모아 궁궐에 들어갈 때 '여우'를 다음과 같이 처리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긴급 상황이 필요할 수 있으며, 이 선언의 분명한 목적은 그의 추종자들을 선동하여 여왕을 살해하는 것이다." 서울로 향하는 일행은 서문 밖에서 쿤렌타이 군과 마주한 뒤 더욱 빠르게 궁궐로 진격했다.

ibid.(ib.) 약어 (바로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책[글]에서(라틴어 ibidem에서 나옴)

palanquin 중국 인도 등의 1인승 가마/탈것

exigency 긴급 사태/급한 볼일

[Footnote 4: Ibid.] The Japanese Court of Preliminary Enquiries, which had Viscount Miura and his assistants before it after the murder, reported all the facts up to this point with great frankness. I have used its account solely in the above description. The Court having gone so far, then added a final finding which probably ranks as the most extraordinary statement ever presented by a responsible Court of law. "Notwithstanding these facts, there is no sufficient evidence to prove that any of the accused actually committed the crime originally meditated by them.... For these reasons the accused, each and all, are hereby discharged."

[각주 4: 동일] 살인 사건 이후 미우라 자작과 그의 보좌관들을 재판에 회부한 일본 예심 재판소는, 지금까지의 모든 사실을 아주 솔직하게 보고했고, 나는 위 글에서 그에 대해 언급했다. 지금까지 진행된 법원의 상황은 책임있는 법원이 제시할 수 있는 가장 특별한 진술로 평가될 최종 판결을 추가했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피고인 중 누군가가 원래 계획한 범죄를 실제로 저질렀다는 것을 입증할 충분한 증거가 없다. 이러한 이유로 피고인은 모두 이에 따라 면제됩니다."

What happened after the Regent and the Japanese reached the palace? The party advanced, with the Kunrentai troops to the front. Behind them were the police, the officers in charge, and twenty-six Japanese. An inner group of these, about half of them, had special orders to find the Queen and kill her. The gates of the palace were in the hands of Japanese soldiers, so the conspirators had free admission. Most of the regular troops paraded outside, according to orders. Some went inside the grounds, accompanied by the rabble, and others moved to the sides of the palace, surrounding it to prevent any from escaping. A body of men attacked and broke down the wall near to the royal apartments.

섭정과 일본인이 궁궐에 도착한 후 무슨 일이 일어났나?

일행은 쿤렌타이(Kunrentai) 군대를 선두로 전진했다. 그 뒤에는 경찰과 담당 경찰관, 그리고 일본인 26명이 있었다. 이들 중 약 절반에 해당하는 내부 그룹은 여왕을 찾아 죽이라는 특별 명령을 받았다. 궁전의 문은 일본군의 손에 있었기 때문에 공모자들은 쉽게 궁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대부분의 정규군은 명령에 따라 밖으로 행진했다. 일부는 폭도들과 함께 경내로 들어갔고, 일부는 탈출을 막기 위해 궁전 옆으로 이동하여 궁전을 둘러쌌다. 한 무리의 남자들이 왕궁 근처의 성벽을 공격하여 무너뜨렸다.

rabble 폭도/무리/서민

Rumours had reached the palace that some plot was in progress, but no one seems to have taken much trouble to maintain special watch. At the first sign of the troops breaking down the walls and entering through the gates, there was general confusion. Some of the Korean bodyguard tried to resist, but after a few of them were shot the others retired. The royal apartment was of the usual one-storied type, led to by a few stone steps, and with carved wooden doors and oiled-paper windows. The Japanese made straight for it, and, when they reached the small courtyard in front, their troops paraded up before the entrance, while the soshi broke down the doors and entered the rooms. Some caught hold of the King and presented him with adocument by which he was to divorce and repudiate the Queen. Despite every threat, he refused to sign this. Others were pressing into the Queen's apartments. The Minister of the Household tried to stop them, but was killed on the spot. The soshi seized the terrified palace ladies, who weare running away, dragged them round and round by their hair, and beat them, demanding that they should tell where the Queen was. They moaned and cried and declared that they did not know. Now the men were pressing into the side-rooms, some of them haulingthe palace ladies by their hair. Okamoto, who led the way, found a little woman hiding in a corner, grabbed her head, and asked her if she were the Queen. She denied it, freed herself, with a sudden jerk, and ran into the corridor, shouting as she ran. Her son, who was present, heard her call his name three times, but, before she could utter more, the Japanese were on her and had cut her down. Some of the female attendants were dragged up, shown the dying body, and made to recognize it, and then three of them were put to the sword.

어떤 음모가 진행 중이라는 소문이 왕궁에 이르렀지만 누구도 특별 경계를 위해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것 같았다. 일본 군대가 성벽을 허물고 성문을 통해 입성하는 징후가 보이자 전반적인 혼란이 일어났다. 한국 경호원 중 일부는 저항하려 했으나 몇 명이 총에 맞자, 다른 경호원들은 물러났다. 왕실 처소는 일반적인 단층 유형으로 몇 개의 돌계단으로 이어져 있으며, 조각된 나무 문과 기름칠된 창문이 있었다. 일본인들은 곧장 나아갔고, 앞쪽의 작은 안뜰에 도달했을 때, 그들의 군대는 입구 앞으로 향했고 소시는 문을 부수고 방으로 들어갔다. 어떤 사람(일본인)들은 왕을 붙잡고 그에게 왕비와 이혼하고 절연하겠다고 적힌 문서를 제시했다. 온갖 위협에도 불구하고 왕은 서명을 거부했다. 다른 사람들은 여왕의 처소로 몰려들었다. 궁내 장관이 그들을 막으려 했으나 그 자리에서 살해당했다. '소시'는 겁에 질려 도망가는 궁녀들을 붙잡아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끌고 구타하며 왕비가 어디 있는지 말하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신음하고 울면서도 (왕비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했다. 이내 남자(일본인)들은 옆방으로 들어가고 있었고, 그들 중 일부는 궁녀들의 머리를 잡아 끌고 있었다. 앞장서던 오카모토는 구석에 숨어 있던 여인을 발견하고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는 여왕이냐고 물었다. 그녀는 그것을 부정하고 갑자기 몸을 풀고 소리를 지르며 복도로 달려갔다. 그 자리에 있던 그녀의 아들은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세 번 부르는 것을 들었지만, 그녀가 더 말을 하기도 전에 일본인들이 그녀에게 달려들어 그녀를 베어 버렸다. 시녀 몇 명을 끌어다가 죽어가는 시신을 보여주며 알아보게 한 뒤 세 명을 칼에 찔렀다.

adocument 문서/기록

repudiate 거부하다/물리치다/절연하다

soshi ? (사람이름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뜻인지 모르겠음. 첫글자가 대문자가 아닌게 이상함.-.-;;)

The conspirators had brought kerosene with them. They threw a bedwrap around the Queen, probably not yet dead, and carried her to a grove of trees in the deer park not far away. There they poured the oil over her, piled faggots of wood around, and set all on fire. They fed the flames with more and more kerosene, until everything was consumed, save a few bones. Almost before the body was alight the Regent was being borne in triumph to the palace under an escort of triumphant Japanese soldiers. He at once assumed control of affairs. The King was made a prisoner in his palace. The Regent's partizans were summoned to form a Cabinet, and orders were given that all officials known to be friendly to the Queen's party should be arrested.

공모자들은 등유를 가지고 왔다. 그들은 아마도 아직 죽지 않았을 여왕의 주위에 침대보를 던지고 멀지 않은 공원에 있는 나무 숲으로 여왕을 끌고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그녀에게 기름을 붓고 주위에 나무 다발을 쌓은 다음 모두 불을 질렀다. 그들은 뼈 몇 개만 남기고 모든 것이 다 소모될 때까지 점점 더 많은 양의 등유를 불에 넣었다. 시신이 모두 전소되기 전에 섭정은 승리를 거둔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며 궁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즉시 업무를 통제하게 되었다. 왕은 그의 궁궐에 포로가 되었다. 섭정의 당파들은 내각을 구성하기 위해 소환되었고, 여왕의 당에 우호적인 것으로 알려진 모든 관리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kerosene 등블용 석요/등유

faggot 나무 한 단/고기 경단/장작뭇/다발, 단으로 묶다

alight 불붙은/불타는/앉다/내리다

https://youtu.be/9VXuuTg7_g8?si=8MHfqvv5dKaV5Mxa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라 하겠지만... 시대롤 읽지 못해 미리 준비하지 못하고, 대비하지 못한... 여전히 유교주의와 성리학에 갖혀있던 당시 조선의(섭정 대원군의) 어리석음과 무능함이 낳은 비극이라 하겠다.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일국의 왕비를 지들 마음대로 살해하는 일본의 만행은 그야말로 '천인공노'할 일이지만 말이다.

The Japanese were not content with this. They did everything they could, the Regent aiding them, to blacken the memory of the murdered women. A forged Royal Decree, supposed to have been issued by the King, was officially published, denouncing Queen Min, ranking her among the lowest prostitutes, and assuming that she was not dead, but had escaped, and would again come forward. "We knew the extreme of her wickedness," said the decree, "but We were helpless and full of fear of her party, and so could not dismiss and punish her. We are convinced that she is not only unfitted and unworthy to be Queen, but also that her guilt is excessive and overflowing. With her We could not succeed to the glory of the Royal ancestors, so We hereby depose her from the rank of Queen and reduce her to the level of the lowest class."

일본인은 이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살해된 여성들에 대한 기억을 흐리게 만들기 위해(만들기 위해) 섭정의 도움을 받아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왕이 내린 것으로 추정되는 위조된 칙령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어, 혹시 죽지 않고 탈출하여 다시 등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민왕후를 비난하고 그녀를 최하급 매춘부로 분류하였다. 칙령은 이러했다. "우리는 그녀의 사악함의 극치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무력했고 그녀의 일당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그녀를 폐위 하거나 처벌할 수 없었다. 우리는 그녀가 여왕이 되기에 부적합하고 합당하지 않다고 확신하며 또한 그 죄악이 너무 과하고 넘쳐 왕조의 영광을 잇지 못하였으므로 이로써 그녀를 왕비의 자리에서 폐위시키고 최하급으로 강등시킨다."

The poor King, trembling, broken, fearful of being poisoned, remained closely confined in his palace. The foreign community, Ministers and missionaries, did their best for him, conveying him food and visiting him.

불쌍한 왕은 떨고, 망가지고, 독살될까 두려워서 그의 궁전에 갇혀 지냈다. 외국인 공동체-목사들과 선교사들은 그에게 음식을 전달하고 방문하는 등 그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If the Japanese thought that their crime could be hushed up they were much mistaken. Some of the American missionaries' wives were the Queen's friends. A famous American newspaper man, Colonel Cockerill, of the New York _Herald_, came to Seoul, and wrote with the utmost frankness about what he learned. So much indignation was aroused that the Japanese Government promised to institute an enquiry and place the guilty on trial. Ito was then Prime Minister and declared that every unworthy son of Japan connected with the crime would be placed on trial. "Not to do so would be to condemn Japan in the eyes of all the world," he declared. "If she does not repudiate this usurpation on the part of the Tai Won Run, she must lose the respect of every civilized government on earth." Miura and his associates were, in due course, brought before a court of enquiry. But the proceedings were a farce. They were all released, Miura became a popular hero, and his friends and defenders tried openly to justify the murder.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범죄를 은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큰 착각이었다. 미국 선교사들의 아내 중 일부는 여왕의 친구였다. 미국의 유명한 신문인인 뉴욕 헤럴드의 Cockerill 대령이 서울에 와서 그가 알게 된 내용을 최대한 솔직하게 썼다. 너무나 큰 분노가 일어나 일본 정부는 조사를 실시하고 유죄를 선고할 것을 약속했다. 당시 총리였던 이토는 범죄와 관련된 일본인 관련자들을 재판에 회부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건 곧 전 세계의 눈으로 일본을 비난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녀가 태원런 측의 이러한 찬탈을 부인하지 않는다면 그녀는 지구상의 모든 문명 정부의 존경을 잃게 될 것입니다." 미우라와 그의 동료들은 적절한 시기에 조사 법원에 회부되었다. 그러나 법 진행 과정은 우스꽝스러웠다. 그들은 모두 석방되었고 미우라는 영웅이 되었으며 그의 친구들과 변호인들은 공개적으로 살인을 정당화하려고 했다.

hush something up 숨기다/은폐하다

indignation 분개/분함

enquiry 공식적 조사/수사/질의/문의

every unworthy son 부덕한 자/불초한 자식/쓸모없는 아들

repudiate 거부하다/물리치다/절연하다/이혼하다

usurpation 강탈/탈취/권리침해/왕위 찬탈

farce 익살극/소극/웃음거리

Japan, following her usual plan of following periods of great harshness by spells of mildness, sent Count Inouye as Envoy Extraordinary, to smooth over matters. He issued a decree restoring the late Queen to full rank. She was given the posthumous title of "Guileless, revered" and a temple called "Virtuous accomplishment" was dedicated to her memory. Twenty-two officials of high rank were commissioned to write her biography. But the King was still kept a prisoner in the palace.

일본은 잔혹한 일을 저지른 후에는 언제나 그랬듯 온화함을 나타내며 문제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이노우에 백작을 특사로 보냈다. 그는 고인이 된 여왕을 전직으로 복원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그녀는 사후에 "순진하고 존경받는"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덕업"이라는 사원이 그녀를 기리기 위해 헌정되었다. 22명의 고위 관리들이 그녀의 전기를 쓰도록 했다. 그러나 왕은 여전히 ​​궁궐에 갇혀 있었다.

posthumous 사후의

guileless 정직한/속임수를 모르는

revered 존경받는

▶살인을 해 놓고... 사후에 기리는 건 대체 뭔가? 조롱인가? 엿 먹이는 건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Then came a bolt from the blue. The Russian Minister at Seoul at this time, M. Waeber, was a man of very fine type, and he was backed by a wife as gifted and benevolent as himself. He had done his best to keep in touch with and help the King. Now a further move was made. The Russian Legation guard was increased to 160 men, and almost immediately afterwards it was announced that the King had escaped from his jailers at the palace, and had taken refuge with the Russians. A little before seven in the morning the King and Crown Prince left the palace secretly, in closed chairs, such as women use. Their escape was carefully planned. For more than a week before, the ladies of the palace had caused a number of chairs to go in and out by the several gates in order to familiarize the guards with the idea that they were paying many visits. So when, early in the morning, two women's chairs were carried out by the attendants, the guards took no special notice. The King and his son arrived at the Russian Legation very much agitated and trembling. They were expected, and were at once admitted. As it is the custom in Korea for the King to work at night and sleep in the morning, the members of the Cabinet did not discover his escape for some hours, until news was brought to them from outside that he was safe under the guardianship of his new friends.

이후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당시 주한 러시아 공사 Waeber 씨는 매우 훌륭한 사람이었는데... 그 자신만큼 재능 있고 자비로운 아내의 후원(지지)을 받았다. 그는 왕과 연락을 유지하고 돕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이제 그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갔다. 러시아 공사관 경비병은 160명으로 늘어났으며, 거의 즉시 왕이 궁전의 간수들로부터 탈출하여 러시아군과 함께 피신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아침 7시가 조금 되기 전에 국왕과 세자는 여인들이 사용하는 닫힌 의자(가마)에 앉아 몰래 궁궐을 나갔다. 그들의 탈출은 신중하게 계획되었다. 일주일 전부터 궁전의 귀부인들은 경비병들에게 자신들이 자주 방문하고 있다는 생각을 심어주기 위해 수차례 의자(가마) 출입을 하게 했다. 그런 까닭에 이른 아침에 수행원들이 여성용 의자(가마) 두 개를 옮겼을 때 경비원들은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국왕과 그의 아들은 매우 불안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했다. 러시아 공사관에서는 그들을 방문을 예상했고, 즉시 승인되었다. 국왕은 밤에 일하고 아침에 자는 것이 한국의 풍습이었기 때문에 대신 각료들은 몇 시간 동안 그의 탈출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나, 왕이 새로운 친구들의 보호 아래 안전하다는 소식이 외부로부터 전해졌다.

a bolt from the blue 뜻밖의 일이 벌어지다

benevolent 자애로운

Excitement at once spread through the city. Great crowds assembled, some armed with sticks, some with stones, some with any weapons they could lay hands on. A number of old Court dignitaries hurried to the Legation, and within an hour or two a fresh Cabinet was constituted, and the old one deposed.

흥분이 단번에 도시 전체에 퍼졌다. 많은 군중이 모여들었는데, 일부는 막대기로, 일부는 돌로, 일부는 손에 쥘 수 있는 무기를 들고 있었다. 많은 궁정 고관들이 서둘러 공사관으로 달려갔고, 한두 시간 안에 새로운 내각이 구성되었고, 기존 내각은 해임되었다.

dignitary 고위관리

The heads of the Consulates and Legations called and paid their respects to the King, the Japanese Minister being the last to do so. For him this move meant utter defeat. Later in the day, a proclamation was spread broadcast, calling on the soldiers to protect their King, to cut off the heads of the chief traitors and bring them to him. This gave final edge to the temper of the mob. Two Ministers were dragged into the street and slaughtered. Another Minister was murdered at his home. In one respect the upheaval brought peace. The people in the country districts had been on the point of rising against the Japanese, who were reported to be universally hated as oppressors. With their King in power again, they settled down peaceably.

영사관과 공사관의 장들이 국왕에게 전화를 걸어 경의를 표했고, 일본 대신은 마지막으로 경의를 표했다. 그(일본 대신)에게 있어 이 움직임은 완전한 패배를 의미했다. 그날 늦게 군인들에게 왕을 보호하라고 명하고, 주요 반역자들의 머리를 잘라 그에게 데려오라는 선언문이 발표되었다. 그 선언은 군중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되었다. 두 명의 장관이 거리로 끌려나와 살해당했고, 또 다른 장관은 그의 집에서 살해당했다. 어떤 면에서는 격변이 평화를 가져온 셈이었다. 전국적으로 탄압자로 미움을 받는 일본군에 대해 시골 지역 주민들까지 반란을 일으킬 상황에 처해 있었다. 왕이 무사하여 다시 집권하자 민중들은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왔다.

utter 완전한/순전한/소리를 내다/말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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