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ch 16, 2025

조선시대 과거시험-낭만적이었네… 아니면 철학적…?

 아래 글은 인터넷에서 본 '펌글'이다. 조선시대의 과거시험 문제가 뜻밖에도 낭만적인 것 같아 옮겨와 본다.

예나 지금이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사람사는 모습은 본질적으로 비슷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인간이 제 아무리 옘병을 해도... 먹고 살아야 하고, 먹여 살리기 위해, 자기 자신과 번뇌하고, 세상과 혹은 다른 인간과 투쟁하고 충돌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이 가지는 그 본질적인 번뇌와 고뇌, 고독과 외로움, 그리고 역경은 (아마도) 만 년후에도 몇 십 억년 후에도 (인간이 멸종하지 않는 한) 크게 변하지 않을 것 같다.



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섣달 그믐밤이 되면 쓸쓸해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에 대해 논하라.”

1616년 ‘증광회사’에서 광해군이 낸 책문 과거시험에서 임금이 출제하는 마지막 문제.

1616년 갓 마흔을 넘긴 광해군은 선비들에게 ‘책문’하였습니다. 섣달 그믐이란... 바로 이즈음 한해의 마지막 밤을 의미하지요.

묵은해와 이별하는, 까닭 없이 쓸쓸한 마음은 임금도 예외는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그 까닭 없는 쓸쓸함이란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대 고려’ 전의 천년 된 유물은 인간이 품은 오랜 소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고려 시대 사찰인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 안에서 수습된 두루마리 천 조각. 무려 길이 10미터가 넘는 ‘발원문’(신이나 부처에게 소원을 비는 내용을 적은 글)에는 각종 신분을 망라한 천여 명의 이름과 함께 각자의 ‘소망’이 적혀있었습니다.

“두 살배기 어을진이 장수하기를 발원합니다.” 자식의 무병장수를 기원한 부모가 있었고, “여자는 남자가 되게 하소서”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절절한 소망도 발견됩니다.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 천명의 고려인들이 꿈꾸었던 희망들... 그들의 소망은 모두 이루어졌을까...

그리고 여기... 오늘과는 다른 내일을 꿈꾸는 이들이 써 내려간 2018년, 오늘의 발원문이 있습니다. 지난 1년간 앵커브리핑의 페이스북에 달린 시청자 여러분이 바라는 세상.

“내 집 한 채 가질 수 있기를”, “갑질하지 못하도록 갑을 끌어내리는 을이 됩시다.”, “살아남고 싶다. 안전모가 있었으면...”, “바위가 깨어지기까지 계란을 놓지 않을 겁니다.”

소망은 각자 다르지만 서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천 년 전이나, 4백 년 전이나, 그리고 오늘을 사는 시민들의 길고 긴 발원문 역시... 정치와 권력이 그리고 언론이 주목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섣달 그믐밤의 쓸쓸함에 대하여 논하라.’ 임금의 질문에 대한 문인 이명한의 냉정한 답은 이러했습니다.

“그 까닭은...묵은해의 남은 빛이 아쉬워서... 그러나 세월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 또한 부질없는 생각일 뿐, 부디 정진하소서”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섣달 그믐밤이 되면 서글퍼지는 이유에 대해 논하라’]

광해군은 1616년(광해군 8년) 치러진 증광회시에서 낸 ‘책문’이다.

“가면 반드시 돌아오니 해이고, 밝으면 반드시 어두우니 밤이로다. 그런데 섣달 그믐밤에 꼭 밤을 지새우는 까닭은 무엇인가. 세월이 흘러감을 탄식하는 데 대한 그대들의 생각을 듣고 싶다.”

조선 광해군 ‘섣달 그믐밤이 되면 서글퍼지는 이유에 대해 논하라’에 대한 과거 시험 답안.

[책문]

*임금이 신하에게 내려서 명령하던 글발.

*책문(柵文)은 조선 시대 과거 시험의 한 종류로, 외교 문서 작성 능력을 평가하기 위해 시행된 시험.

가면 반드시 돌아오니 해이고, 밝으면 반드시 어두워지니 밤이로다. 그런데 섣달 그믐밤에 꼭 밤을 지새는 까닭은 무엇인가? 또한 소반에 산초를 담아 약주와 안주와 함께 웃어른께 올리고 꽃을 바치는 풍습과 폭죽을 터뜨려 귀신을 쫓아내는 풍습은 섣달 그믐밤에 밤샘하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침향나무를 산처럼 얽어서 쌓고 거기에 불을 붙이는 화산(火山) 풍습은 언제부터 생긴 것인가? 섣달그믐 전날 밤에 하던 액막이 행사인 대나(大儺)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함양의 여관에서 주사위 놀이를 한 사람은 누구인가? 여관에서 쓸쓸히 깜박이는 등불을 켜놓고 잠을 못 이룬 사람은 왜 그랬는가? 왕안석은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것을 시로 탄식했다. 소식(蘇軾)은 도소주(屠蘇酒)를 나이순에 따라 젊은이보다 나중에 마시게 된 슬픔을 노래했다. 이것들에 대해 상세히 말해 보라.

어렸을 때는 새해가 오는 것을 다투어 기뻐하지만 점차 나이를 먹으면 모두 서글픈 마음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세월이 흘러감을 탄식하는 데 대한 그대들의 생각을 듣고 싶다.

['이명한'의 답안]

"밝음은 어디로 사라지고 어둠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잠깐 사이에 세월은 흐르고 그 가운데 늙어 가는구나!” 한 것은 바로 위응물(韋應物)의 말입니다. 뜬구름 같은 인생이 어찌 이리도 쉽게 늙는단 말입니까? 하루가 지나가도 사람이 늙는데, 한 해가 지나갈 때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네 마리 말이 끌듯 빨리 지나가는 세월을 한탄하고 우산(牛山)에 지는 해를 원망한 것도 유래가 오래 되었습니다.

부싯돌의 불처럼 짧은 인생 집사 선생의 질문을 받고 보니, 제 마음에 서글픈 생각이 떠오릅니다. 한 해가 막 끝나는 날을 섣달 그믐날이라 하고, 그 그믐날이 막 저물어 갈 때를 그믐날 저녁이라고 합니다. 네 계절이 번갈아 갈리고 세월이 오고 가니, 우리네 인생도 끝이 있어 늙으면 젊음이 다시 오지 않습니다. 역사의 기록도 믿을 수 없고, 인생은 부싯돌의 불처럼 짧습니다. 100년 후의 세월에는 내가 살아 있을 수 없으니 손가락을 꼽으며 지금의 이 세월을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늙어 가는 세월이 안타까워 물음에 따라 조목별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소반에 산초를 담아 약주와 안주와 함께 웃어른께 올리고 꽃을 바쳐 봄소식을 알리고, 폭죽을 터뜨리고 환성을 질러 온갖 귀신의 소굴을 뒤집는 것은 진한(秦漢)의 풍습에서 나온 것도 있고 형초(荊楚) 지방의 풍속에서 나온 것도 있습니다. 모두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재앙을 떨어 버리고 복을 기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굳이 오늘 다 말씀드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침향나무로 산을 만들고 불꽃을 수 길이나 타오르게 하는 것은 수나라에서 전해지니 천박한 풍습이나, 이 또한 말하자면 길어집니다. 환관들의 아들을 뽑아 검은 옷을 입혀 행렬을 짓게 해서, 역귀와 잡신을 몰아내는 의례는 후한 때부터 생긴 일이니, 굳이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제가 알기로 함양의 여관에서 해가 바뀌려고 할 때 촛불을 밝히고 주사위 놀이를 한 사람은 두보(杜甫)입니다. 여관에서 깜박이는 등을 밝히고 멀리 떨어진 고향을 그리며, 거울로 허옇게 센 머리를 들여다보며 안타까워한 사람은 바로 고적(高適)입니다.

온 세상에 재주와 이름을 떨쳤건만 어느덧 늙어 버렸고, 서울에서 벼슬살이하다가 저무는 해에 감회가 깊어진 것입니다. 젊었을 때 품었던 꿈은 아직 다 이루지 못했건만 힘겹게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니, 늙음이 안타깝고 흐르는 세월이 안타까워 잠들지 못했던 것입니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한다는 것은 왕안석의 시이고, 도소주(屠蘇酒)를 나이순에 따라 나중에 마시게 되었다는 것은 소식의 시입니다. 사물은 다하면 새로 시작되고, 사람은 옛사람이 사라지면 새로운 사람이 태어나니, 새것에 대한 감회가 있었던 것입니다. 도소주를 마실 때는 반드시 어린 사람이 먼저 마시니, 나중에 마시는 사람일수록 늙은 사람입니다. 인생은 구렁텅이에 빠진 뱀과 같고, 백년 세월도 훌쩍 지나갑니다.

지난날을 돌이키면 괴로움만 남는데 살아갈 날은 얼마 남지 않았으니, 글로 표현하자니 모두 안타까운 호소일 뿐입니다.

늙은이나 젊은이나 마음은 다 같고,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날은 다 똑같은 날입니다. 어릴 때는 폭죽을 터뜨리며 악귀를 쫓는 설날이 가장 좋은 명절이어서, 섣달 그믐날이 빨리 오기를 손꼽아 기다립니다. 그러나 점점 나이가 들어 의지와 기력이 떨어지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세월을 묶어 둘 수도 붙잡아 둘 수도 없습니다. 날은 저물고 길은 멀건만 수레를 풀어 쉴 곳은 없고,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열에 여덟아홉은 됩니다.

몸은 성한데 운이 다한 사람도 있고, 재주는 많은데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객지에서 벼슬하는 사람은 쉽게 원망이 생기고, 뜻있는 선비는 유감이 많습니다. 맑은 가을날에 떨어지는 나뭇잎도 두려운데, 섣달 그믐밤을 지새우는 감회는 당연히 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세월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이지, 세월이 사람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지는 않습니다.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세월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 또한 부질없는 생각일 뿐입니다.

유감없는 인생을 꿈꾸며 두보가 눈 깜짝할 사이에 늙어 버린 것을 문장으로 읊은 것은 그 감회가 오로지 늙음에 있었던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따뜻한 봄날 혼자 즐기면서 비파 소리를 유달리 좋아했다던 고적의 감회가 어찌 한 해가 저무는 것에만 있었겠습니까? 왕안석은 학문을 왜곡하고 권력을 휘두르면서 나라를 어지럽히고 수많은 백성들을 그르쳤는데, 그의 감회가 무엇이었는지 저로서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 기둥에 글을 쓸 만큼 재주가 한 시대를 떨쳤고, 뜻이 천고의 세월도 다 채우지 못할 만큼 컸지만, 남쪽으로 귀양 갔다가 돌아오니 흰머리였다는 미산(眉山)의 학사(學事) 소식(蘇軾)이 느낀 감회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옛사람들이 섣달 그믐밤을 지새우며 느꼈던 감회를 헤아려 진술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감회는 이런 것들과 다릅니다. 우임금이 짧은 시간이라도 아꼈던 것은 무슨 생각에서 그랬던 것입니까? 주공이 밤을 지새우고 날을 맞이했던 것은 무슨 생각에서 그랬던 것입니까? 저는 덕을 닦지도 못하고 학문을 통달하지도 못한 것이 늘 유감스러우니, 아마도 죽기 전까지는 하루도 유감스럽지 않은 날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해가 저무는 감회는 특히 유감 중에서도 유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근거로 스스로 마음에 경계합니다. “세월은 이처럼 빨리 지나가고, 나에게 머물러 있지 않는다. 죽을 때가 되어서도 남들에게 칭송받을 일을 하지 못함을 성인은 싫어했다. 살아서는 볼만한 것이 없고 죽어서는 전해지는 것이 없다면, 초목이 시드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무지한 후진을 가르쳐 인도하고, 터득한 학문을 힘써 실천하며, 등불을 밝혀 밤늦도록 꼿꼿이 앉아, 마음을 한곳에 모으기를 일평생 하자. 그렇게 하면 깊이 사색하고 반복해서 학습하게 되어 장차 늙는 것도 모른 채 때가 되면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일 것이니, 마음에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앞에서 거론한 몇 사람의 안타까운 감정은 논할 바가 아닙니다.

집사 선생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삼가 대답합니다.

[1558년(명종 13년) 과거시험에서 율곡선생이 장원한 답안]

[문제]

가. 천도(天道: 자연의 이치)는 알기도 어렵고 또 말하기도 어렵다. 해와 달이 하늘에 걸려서 한 번은 낮이 되고 한 번은 밤이 되는데, 더디고 빠른 것은 누가 그렇게 한 것인가? 간혹 해와 달이 함께 나와서 때로는 겹쳐서 일식과 월식이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나. 오성(五星: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은 씨줄이 되고 여러 별은 날줄이 되는 것 또한 상세하게 말할 수 있는가? 상서로운 별은 어느 때에 나타나며 상서롭지 못한 별이 나오는 것은 역시 어느 때 있는 것인가? (상서로운: 복이 되며 길한일이 일어날 기미가 있다.)

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만물의 기운의 정수(에센스)가 올라가서 여러 별이 된다.”라고 하는데, 이 말은 또한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 바람은 어느 곳에서 일어나 어디로 들어가는가? 어떤 때에는 불어도 나무가 울리지 아니하는데, 어떤 때에는 나무를 꺾고 집을 허물어뜨리며, 순풍도 되고 폭풍도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라. 구름은 어디로부터 일어나며, 흩어져서 오색(五色: 청색, 빨간색, 노란색, 흰색, 검은색)이 되는 것은 무엇에 감응한 것이며, 간혹 연기 같고 연기 아닌 것 같기도 한 것이 뭉게뭉게 어지러이 피어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안개는 무슨 기운이 발한 것이며, 그것이 붉고 푸르게 되는 것은 무슨 징조인가? 누런 안개가 사방을 막기도 하고, 낮에 많은 안개가 끼어 어둡기도 한 것은 또 무엇 때문인가?

마. 우레와 벼락은 누가 이를 주재하여 그 빛이 번쩍번쩍하고 그 소리가 두려운 것은 무엇 때문인가? 간혹 사람이나 물건이 벼락을 맞는 것은 또 무슨 이치인가? 서리는 풀을 죽이고 이슬은 만물을 적시는데, 서리가 되고 이슬이 되는 이유를 들어 볼 수 있는가? 남월(南越: 베트남 국경과 가까운 중국 남부 지역)은 따뜻한 지방으로 6월에 서리가 내리는 것은 혹독한 괴변인데, 당시의 일을 상세하게 말할 수 있는가? 비는 구름을 따라 내리는 것인데, 간혹 구름만 자욱하고 비가 오지 아니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바. 신농씨(神農氏: 중국 고대의 전설적인 제왕) 때에는 비가 오기를 원하면 비가 오는 태평한 세상이라 서른여섯 번의 비가 있었으니, 천도(天道)도 사사롭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있는가? 혹은 군사를 일으킬 적에 비가 오고, 혹은 감옥의 일을 판결할 적에 비가 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사. 초목의 꽃술은 다섯 잎으로 된 것이 많은데, 눈꽃은 유독 여섯 잎으로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눈 위에 눕고 눈 속에 서는 것과 손님을 영접하고 벗을 방문하는 일들도 다 말할 수 있는가? 우박은 서리도 아니고 눈도 아닌데, 무슨 기운이 모인 것인가? 어떤 것은 말의 머리만큼 크고 어떤 것은 달걀만큼 커서, 사람과 새와 짐승들을 죽인 것은 어느 때에 있었는가?

아. 천지가 자연계의 여러 현상에 각각 그 기운을 두어서 이루었는가, 아니면 한 기운이 유행하여 흩어져서 여러 현상이 되었는가? 간혹 보통의 도리에 어긋나는 것은 하늘의 기운이 어그러진 때문인가, 사람의 일이 잘못되었기 때문인가?

자. 어떻게 하면 일식과 월식이 없고, 별이 제자리를 잃지 않으며, 우레와 벼락이 치지 않고, 서리가 여름에 내리지 않고, 눈이 너무 많이 내리지 않고, 우박이 재앙이 되지 않고, 풍해와 수해가 없이 각각 그 주기에 순응하여 마침내 천지가 제 자리를 잡고 만물이 길러지는 경지에 이를 수 있는가?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도(道)는 어떤 것에서 말미암는가?

여러 선비들은 널리 경전과 역사서를 통하여 능히 이런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니, 각각 마음을 다하여 대답하라.

[율곡 선생의 답안]

하늘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습니다. 그 이치는 지극히 미묘하되 그것이 드러난 모습은 지극히 뚜렷하니, 이 말을 아는 사람이라야 더불어 천도(天道)를 논할 것입니다. 이제 집사(執事: 시험 감독관) 선생께서 지극히 미묘하고 지극히 드러나는 도(道)에 대해 문제를 내어 궁리하고 연구한 논설을 듣고자 하니, 진실로 학문이 자연과 인간의 이치를 다 꿰뚫은 사람이 아니라면 어찌 능히 이것을 논하겠습니까? 청컨대, 어리석은 저는 평상시에 선각자에게 들은 바를 바탕으로 밝은 물음에 만의 한 가지라도 답하고자 합니다.

생각해보면, 온갖 변화의 근본은 오직 음양(陰陽)의 기운뿐입니다. 이 기운이 움직이면 양이 되고 고요히 있으면 음이 됩니다. 한 번 움직이고 한 번 고요한 것은 기운이요, 그렇게 움직이게 하고 고요하게 하는 것은 이치입니다. 대개 모습들이 천지 사이에 있는 것은 혹은 오행(五行: 다섯 가지 기운인 금·수·목·화·토)의 바른 기운이 모인 것도 있고, 혹은 천지의 괴이한 기운을 받은 것도 있습니다. 혹은 음양이 서로 부딪치는 데서 나기도 하고, 혹은 음과 양 두 기운이 발산하는 데서 나기도 하기 때문에 해, 달, 별은 하늘에 걸렸고, 비, 눈, 서리, 이슬은 땅으로 내립니다. 바람과 구름이 일어나고 우레와 번개가 일어나는 것은 이 기운의 움직임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늘에 걸리게 하고 땅에 내리게 하며,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게 하고 우레와 번개가 일어나게 하는 것은 이 이치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음과 양이 진실로 조화를 이루면 저 하늘에 걸린 것은 그 질서를 잃지 않고, 땅에 내리는 것은 다 때(타이밍)에 순응합니다. 그리하여 바람과 구름과 우레와 번개가 다 조화로운 기운 속에 있게 되니, 이것은 이치가 올바른 것입니다. 그러나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그 운행하는 것이 질서를 잃고 그 발산하는 것이 때를 잃어서 바람과 구름과 우레와 번개는 다 괴이한 기운에서 나옵니다. 이것은 이치가 변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곧 천지의 마음이므로 사람의 마음이 바르면 천지의 마음도 또한 바르고, 사람의 기운이 순하면 천지의 기운도 순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치가 올바른 것이나 이치가 변하는 것을 모두 천도에만 맡겨서야 되겠습니까? 저는 이것에 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어둡고 아득한 기운이 처음으로 갈라져서 해와 달이 교대로 밝으니, 해는 지극한 양기(양의 기운)의 정수이고, 달은 지극한 음기(음의 기운)의 정수입니다. 양기의 정수는 빠르게 운행하기 때문에 하루에 하늘을 한 바퀴 돌고, 음기의 정수는 더디게 운행하기 때문에 하루에 다 돌지 못합니다. 양이 빠르고 음이 더딘 것은 기운이요, 음이 더디게 되는 것과 양이 빠르게 되는 것은 이치입니다. 저는 누가 그렇게 하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해는 임금의 상징이요. 달은 신하의 상징입니다. 그것이 운행하는 데 궤도를 같이 하고 만나는 데 주기를 같이 하기 때문에 달이 해를 가리면 일식이 되고, 해가 달을 가리면 월식이 되는 것입니다. 달이 희미한 것은 오히려 변괴가 되지 않지만 해가 희미한 것은 음이 성하고 양이 미약한 까닭이니,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깔보고 신하가 임금을 거역하는 형상입니다. 하물며 두 개의 해가 한꺼번에 나오거나 두 개의 달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것은 비상한 괴변이니, 다 괴이한 기운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일찍이 옛일을 탐구해 보니 재앙과 변괴는 덕으로 정치가 행해지는 때에는 나타나지 않고, 일식과 월식의 변괴는 나라가 망해가는 쇠퇴한 정치에서 나왔습니다. 하늘과 사람이 서로 합하는 것을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지금 하늘이 푸른 것은 기운이 쌓여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 그 자체의 색은 아닙니다. 만약 별이 찬란하게 빛나지 않는다면 하늘의 운행 질서는 아마도 밝혀지지 못할 것입니다.

저 별들이 반짝반짝하고 가물가물하는 것이 각각 자리와 차례가 있는 것은 왜일까요? 모두 근원적인 기운의 운행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여러 별들은 하늘을 따라 운행하고 스스로 운행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날줄이라 하고, 오성(五星)은 때를 따라 각각 나타나고 하늘을 따라 운행하지는 않기 때문에 씨줄이라고 합니다. 하나는 정한 차례가 있고 하나는 일정한 질서가 없습니다. 그 대강을 말하면 하늘은 날줄이 되고 오성은 씨줄이 됩니다. 하지만 그 상세한 것을 말하자면 한 장의 종이에다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상서로운 별도 늘 나타나는 것은 아니며, 괴이한 별도 늘 나타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별 가운데 상서로운 것은 반드시 밝은 세상에 나타나고, 별 가운데 괴이한 것은 반드시 쇠퇴한 세상에 나타납니다. 중국 고대의 성인인 요임금과 순임금의 학문이 밝은 세상에는 상서로운 별이 나타났고, 춘추전국시대에는 괴이한 별이 나타났습니다. 요임금과 순임금 시대처럼 다스려졌던 때가 한 번뿐이 아니며, 춘추전국시대처럼 어지러운 시대도 한 번만이 아닌데, 어찌 일일이 들어 진술하겠습니까?

만물의 정기가 위로 올라가 별이 된다고 하는 따위의 말에 대해서는 저는 의심스러운 생각이 듭니다. 별이 하늘에 있는 것은 오행의 정수요, 자연의 기운입니다. 저는 어떤 사물의 정기가 어떤 별이 되었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선비가 믿을 바가 아닙니다.

별이라는 것은 기운이 텅 비어 엉긴 것입니다. 혹시 음기가 맺히지 못하면 간혹 떨어져서 돌이 되기도 하고 언덕이 되기도 한다는 것은 사물의 정기가 별이 된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또 대개 천지 사이에 가득 찬 것은 다 기운입니다. 음기가 엉기고 모여서 밖에 있는 양기가 들어가지 못하면 돌고 돌아서 바람이 되는 것입니다. 만물의 기운은 비록 말하기를, “동북 방향에서 나와 남서 방향으로 들어간다.”고 하지만, 음기의 모이는 것이 정해진 곳이 없으므로 양의 흩어지는 것도 일정한 방향이 없습니다. 큰 땅덩이가 기운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어찌 한 방향에만 달려 있겠습니까? 동쪽에서 일어나는 것이 만물을 기르는 바람이지만, 그렇다고 동쪽에서 처음 시작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서쪽에서 일어나는 것은 만물을 시들게 하는 바람이지만, 그렇다고 서쪽에서 처음 시작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나무에 새가 깃들어 집을 짓고 빈 구멍에 바람이 불지만, 그렇다고 빈 구멍에서 처음 시작된다고 하겠습니까? 정자(程子: 중국 송나라 때의 사상가)의 말에, “올해의 우레는 일어나는 곳에서 일어난다.”라고 하였습니다. 바람이 흔들거리고 살랑거리는 것은 기운이 부딪치면 일어나고 기운이 쉬면 그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일정하게 들어오고 일정하게 나가는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잘 다스려지는 시대에는 음과 양의 기운이 고루 펴져서 맺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흩어지더라도 반드시 조화를 이루어 불어도 나뭇가지가 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치가 쇠퇴하면 음과 양의 기운이 뭉쳐져 펴지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이 흩어질 때에는 반드시 격동하여 나무를 꺾고 집을 허물어뜨리는 것입니다. 순풍은 조화를 이루며 흩어지는 것이요, 폭풍은 격동하며 흩어지는 것입니다. 그 기운이 그렇게 된 것은 역시 사람의 일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만약 산천의 기운이 올라가서 구름이 되는 것이라면, 좋고 나쁜 징조를 그를 통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정치를 잘했던 왕들은 사방을 살필 수 있는 대를 설치하고 기상을 살펴서 길흉의 징조를 고찰하였습니다. 대개 좋고 나쁜 징조는 발생하는 그날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앞선 징조가 있기 때문입니다. 구름이 희면 반드시 흩어지는 백성이 있고, 구름이 푸르면 반드시 곡식을 해하는 벌레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검은 구름이 어찌 수재의 징조가 되지 않으며, 붉은 구름이 어찌 전쟁의 징조가 되지 않겠습니까? 누런 구름만이 풍년이 들 상서로운 징조이니, 이는 곧 기운이 먼저 나타난 것입니다.

연기도 아니고 안개도 아닌 것이 분분하게 빛나고 맑게 흩어져 유독 지극히 조화로운 기운을 얻어서 어진 임금의 상서로움이 되는 것은 오직 경사로운 구름입니다. 진실로 백성의 재물을 살지게 하고 노여움을 풀어 주는 덕이 없으면 이것을 이루기가 어렵습니다. 어찌 수(水)·토(土)의 맑고 가벼운 기운이 만든 구름이 흰옷 모양이 되었다가 이내 푸른 개의 모습이 되는 것 정도에 비하겠습니까? 안개는 음기가 새어나가지 못하여 그 김이 막힌 것입니다. 사물의 음기가 모인 것도 능히 안개를 만들어 낼 수 있는데, 대개 산천의 나쁜 기운입니다. 그 붉은 것은 전쟁의 조짐이 되고, 푸른 것은 재앙의 조짐이 되는 것은 모두 음의 기운이 왕성한 징조입니다.

양기가 발산한 뒤에 음기가 양기를 싸서 양기가 나오지 못하면 떨치고 쳐서 우레와 번개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레는 반드시 봄과 여름에 일어나니, 이는 천지의 노한 기운입니다. 빛이 번쩍이는 것은 양기가 발하여 번개가 된 것이요, 소리가 벽력같은 것은 음양 두 기운이 부딪쳐서 우레가 된 것입니다. 예전 선비들은 “우레와 번개는 음양의 올바른 기운이다. 벌레를 놀라게 하기도 하고 간사한 사람을 치기도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도 진실로 사악한 기운이 모인 것이 있고 사물도 역시 사악한 기운이 붙어 있으니, 올바른 기운이 사악한 기운을 치는 것은 또한 당연한 이치입니다. 공자께서 심한 천둥이 칠 때면 반드시 얼굴빛이 변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하물며 마땅히 벼락이 쳐야 할 곳에 친 경우야 두말한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반드시 어떤 것이 있어 벼락 치는 권한을 잡고 주관하는 것이다.”라고 한다면, 이는 멋대로 추측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또 양기가 펴질 때에 이슬로써 만물을 적시는 것은 구름의 젖은 기운이요, 음기가 혹독할 때에 서리로써 풀을 죽이는 것은 이슬이 맺힌 것입니다. 혹시 음기가 지극히 성하면 서리가 제 시기에 내리지 않습니다. 중국의 측천무후가 당나라를 잠시 무너뜨리고 주나라를 세웠을 때 음과 양의 위치가 바뀌어 남월(南越)은 지극히 따뜻한 지방인데도 6월에 서리가 내렸습니다. 이것은 필시 온 세상이 온통 몹쓸 음기 속에 갇혀 있어서인 듯합니다. 측천무후의 일은 더 말할 수 있지만 말하려면 길어집니다.

비와 이슬은 다 구름에서 나오는 것인데 젖은 기운이 성한 것은 비가 되고, 젖은 기운이 적은 것은 이슬이 됩니다. 음양이 서로 합하면 비가 내리는데, 간혹 구름만이 자욱하고 비가 오지 않는 것은 아래위가 서로 합하지 못해서입니다. 또 양이 지극히 왕성하면 가물고 음이 왕성하면 장마가 집니다. 반드시 음양이 조화를 이루어야 비로소 비가 오거나 맑은 날씨가 때를 맞춥니다. 대개 신농씨 같은 성인이 다스리던 순박하고 밝은 시대에 맑은 날씨를 바라면 맑고 비를 바라면 비가 온 것은 진실로 당연한 이치입니다. 어진 임금이 백성을 다스릴 때 하늘과 땅이 화합하여 5일에 한 번씩 바람이 불고 10일에 한 번씩 비가 내린 것도 역시 그 제대로 된 이치입니다. 이 같은 덕이 있으면 반드시 이 같은 보응이 있는 것입니다. 어찌 천도(天道)가 사사로이 후하게 베풂이 있겠습니까. 대개 억울한 기운은 가뭄을 부르기 때문에 한 여자가 억울함을 품어도 오히려 흉년을 이룹니다. 하물며 태평한 세상에는 본래 한 사내나 한 아녀자조차도 그 은택을 입지 않은 이가 없으니, 어찌 비와 바람이 순조롭지 않겠습니까. 지극히 추울 때는 하늘과 땅이 비록 닫히고 막혔으나, 음양이 합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비가 엉겨서 눈이 됩니다. 이것은 대개 음기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초목의 꽃은 양의 기운을 받았기 때문에 꽃술이 다섯 잎이 난 것이 많습니다. 5가 양의 수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눈꽃은 음의 기운을 받았기 때문에 유독 여섯 잎이 되었으니, 6은 음의 수입니다. 이 역시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또 우박은 어그러진 기운에서 나온 것입니다. 음기가 양기를 협박하기 때문에 그것이 발동할 때는 사물을 해칩니다. 옛일을 살펴보면, 우박이 큰 것은 말 머리만 하고 작은 것은 달걀만 합니다. 이런 것들이 사람을 상하게 하고 짐승을 죽였던 일이 전란이 심한 세상에서 일어나기도 하였고 정치를 그르친 임금을 경고하기 위하여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이 역대에 걸쳐 경계가 되기에 충분하였다는 것은 반드시 여러 번 말하지 않아도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근원적인 하나의 기운이 운행하고 조화하여 흩어져서 만 가지 형상이 되는 것입니다. 나누어 말하면 천지와 만 가지 형상이 각각 나름의 기운이지만 합하여 말하면 천지와 만 가지 형상이 모두 같은 하나의 기운입니다. 오행의 바른 기운이 모인 것은 해와 달과 별이요, 천지의 어그러진 기운을 받는 것은 흙비, 안개, 우박이 됩니다. 천둥과 번개는 음양의 두 기운이 서로 부딪치는 데서 생기고, 바람과 구름과 비와 이슬은 두 기가 서로 합하는 데서 생깁니다. 그 나뉨은 비록 다르나 그 이치는 하나인 것입니다.

집사(執事)께서 문제의 끝에서 또 말하기를, “천지가 제 자리를 잡고 만물이 길러지는 것은 그 도(道)가 무엇에 말미암는 것인가?”라고 하였는데, 어리석은 저는 이 말에 깊은 느낌이 있습니다. 저는 “임금은 그 마음을 바르게 함으로써 조정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르게 함으로써 사방을 바르게 하여야 하니, 사방이 바르면 천지의 기운도 바르다.”라고 들었습니다. 또 “마음이 조화로우면 몸이 조화롭고, 몸이 조화로우면 기운이 조화롭고, 기운이 조화로우면 천지의 환한 기운이 응한다.”라고 들었습니다. 천지의 기운이 이미 바르면 해와 달이 어찌 서로 침범하며 별이 어찌 그 자리를 잃는 일이 있겠습니까? 천지의 기운이 이미 조화로우면 천둥과 번개와 벼락이 어찌 위력을 부리고, 바람과 구름과 서리와 눈이 어찌 적합한 때를 잃으며, 흙비를 내리는 어그러진 기운이 어찌 재앙을 만들겠습니까? 하늘은 비와 볕과 더위와 추위와 바람으로 만물을 생성하고, 임금은 엄숙함과 다스림과 밝은 지혜와 슬기로운 계획과 신성함으로 위로 천도에 응하는 것입니다. 하늘이 제때에 비를 내리는 것은 엄숙함에 응한 것이고, 제때에 볕이 나는 것은 다스림에 응한 것이며, 제때에 더운 것은 밝은 지혜에 응한 것이고, 제때에 추운 것은 슬기로운 계획에 응한 것이며, 제때에 바람 부는 것은 신성함에 응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본다면 천지가 안정되고 만물이 길러지는 것은 어찌 임금 한 사람이 덕을 닦는 데 달려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지금 우리나라의 동물과 식물이 모두 자연의 조화로움 속에서 왕성하게 생명을 길러나가는 것이 어찌 임금께서 홀로 삼가는 데 달려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원하옵건대, 집사께서 미천한 자의 어리석은 말을 임금께 아뢰어주신다면 미천한 선비는 움막 속에서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삼가 대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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